재건축아파트 부지를 보면서 문득 내 몸도 저렇게 해체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분해되고 분해되는 우리 몸의 전부를 미동도 없이 바라보고 싶다.

살아 숨쉬는 그릇이었던 우리 육체가 보드라운 흙이 될때까지 가장 미세한 정신의 알갱이가 될 때까지 지켜보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흙의 보드라움을 일구어 모래알이,모래알을 뜨겁게 일구어 자갈이,벽돌이 될때까지 심지어 철근이 될 때까지의 변모를 눈여겨보고 싶어서였다.

솔직히 처음엔 몇십년을 몸맡기고 살았던 공간이 저렇게 쉽게 공중 분해되다니,하면서 아픈쪽으로 전율했었다.

비록 내가 살던 집은 아니었다해도 말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몸도 한번쯤 저렇게 분해될 수 있기를 희망한 것일까?

늦가을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반포의 한 공원에서 만난 느티나무의 가을을 보고 난 후의 부러움 때문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늦가을 그 느티나무는 한 사람 목숨 분으로 무려 5대를 거뜬히 거느리고 서 있었다.

5대의 가지들을 또 15대쯤의 식솔들을,15대의 잔가지들은 또 수천의 푸른 잎새들을 먹여 살리면서도 무척 행복했었구나.

산다는 것은 어느 동네나 유사해서 저 느티나무의 식솔들 또한 휘어지고 굽어진 채로 얼마든지 눈부실 수 있음을 달빛 아래 당당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15대의 작은 가지들은 또 수천 이파리들은 저를 키워준 지상의 기운(氣運)에게 아름답게 바치기 위해 단풍들고 있다.

단풍이 든다는 것은 이형기 선생님의 시 낙화의 한 구절을 흉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헤어져야 할 때를 미리 알고 돌아서는 등은 아름답다"라는 이별의 정한을 단풍처첨 딱 어울리게 흉내낼 수 있는 생물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라는 중얼거림이 오래 남았다.

5대를 또 15대를 한사람 분의 목숨으로 잘 자라내느라 제 살을 흠집 낼 수 밖에 없었던 상처의 시간들은 하늘을 향해 휘어져 눈부시고 또 눈부시구나,라고 속으로 외쳐본다.

한해에 한번씩 제 목숨의 일부를 바치고도 더 없이 눈부시던 느티나무의 가을을 닮고 싶어서 나는 몇십년의 인기척과 온기를 모두 빼앗겨 버린 재건축 부지의 운명까지 부러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