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백인홍은 빈소를 홀로 지키고 있는 진성호에게 조의를 표한 후 빈소 건너편의 문상객을 위해 마련된 장소로 갔다.

진성호의 다른 가족은 눈에 띄지 않았고 진성호의 친구인 듯한 젊은이들과 대해실업의 거래처 사장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사이에 이곳으로 약속장소를 정한 권혁배 의원의 모습이 보였다.

대해실업이 그의 주된 정치자금의 출처이므로 2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대선으로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가 그 곳에 있어야 함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런 권혁배의 모습을 보자 백인홍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는 권혁배가 ''사회노동문제연구소''라는 단체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정치적 목적으로 노동자들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생각났고,동시에 그가 대해직물의 공장을 인수한 후 지난 2개월 동안 노조와의 협상에서 경험한 갈등이 순간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백인홍은 권혁배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백 사장 회사는 IMF사태에 큰 영향이 없나?"

권혁배가 백인홍에게 물었다.

"왜 없겠어? 다 개판이 되었지.개새끼들! 나라경제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도 책임지는 놈이 없어"

"누가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해?"

"국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정치판이 주범이야.지난해 말 노동법이 여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그냥 밀어붙였어야 해.아니…글쎄…실제로 정리해고가 허용되지 않는 상태인데 기업이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아? 공무원은 무서운 사람이 없으면 일을 안하듯이 월급쟁이는 해고당할 위험이 없으면 일을 안해.제조업은 제품 품질이 보장 안되고….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해 무조건 노동자 편을 들어 노동법을 무효화시켰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백인홍이 권혁배가 따라준 소주잔을 들어 입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지난 10년간 임금이 연평균 20% 가까이 올라가고 노동자는 평생직장이 보장된 상태에서 경제발전이 계속될 수 있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역사상 유일한 유토피아야.지난 10년간 한국이 그랬어.반도체 경기를 잘못 읽었다고는 하나 그건 거짓말이야.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호황과 불황이 교차된다는 건 상식이잖아.문제는 터지게 돼 있었어.정치인·학자·언론인·기업가·노동자 모두가 이 사실을 잘 알고도 모른 체 했단 말야.나중에 나라야 어떻게 되든 모두가 자기 이익만,자기 몫만,자기 입지만 챙겼어.정치판에서 바른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정치판이 개판이라 그렇게 못한 거야"

백인홍이 열변을 토했다.

"정치판만 개판이 아니야.이 나라 모든 판이 다 개판이야"

백인홍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권혁배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치판은 다수인 노동자의 눈치를 봐야 하는 속성이 있어.''사회노동문제연구소''도 그런 속성의 하나지.그런데 바른말을 해야 하는 이 나라의 지식인들은 다 어디 갔어?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용기 있는 지식인들이 없다는 거야.모두가 기회주의자야"

취기 때문인지 여느 때의 능구렁이 같은 권혁배가 모처럼 바른소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