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열 < 페인웨버증권 금융컨설턴트 >

상경계통의 대학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날개를 펴보고 싶어하는 월가.

나(50년생)는 대학 졸업 후인 지난 78년,베이치증권에서 월가 생활을 시작했다.

두달여 동안 6번의 인터뷰 끝에 간신히 문턱을 넘은 회사다.

증권 세일즈맨으로 입사한 후 첫 3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무실에 나보다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 없고 나보다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없게 하리라"는 결의를 하고 오전 6시30분 출근,밤 10시 퇴근을 반복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지난 81년초 다른 증권사에 입사했다.

새 직장에서는 주식 분야 대신 통화와 상품 선물 쪽으로 눈길을 돌려 새롭게 승부를 걸었다.

행운이었을까.

때마침 월가에서 파생상품 붐이 일면서 나 자신도 놀랄만한 성과를 올렸다.

밤 12시,새벽 1시께의 퇴근이 오히려 즐거웠다.

남들이 5계약,10계약의 선물을 거래할 때 보통 1백~5백계약을 거래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남들보다 일찍 이 분야에 뛰어들어 잠재고객을 미리 개발해 둔 덕분이었다.

회사내 위치는 수직상승했다.

독방 사무실이 주어지고 개인비서가 배당됐다.

연봉이 몇 배로 뛰었다.

82년,입사 후 처음으로 체어맨스 카운슬(Chairman''s Council)이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실적이 상위 5∼10% 이내에 꼽히는 직원들의 그룹에 진입한 것이다.

이 그룹의 직원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회사 전체 실적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미국 금융업체들은 직원들에게 회사를 사랑하라고,회사에 봉사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회사의 수익에 철저히 기여하는 직원만이 살아남고 우대받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당시 만 32세였다.

그 뒤 친정인 푸르덴셜증권(푸르덴셜이 베이치를 인수합병함)으로 높은 연봉에 역스카우트됐다.

금의환향 후에도 뉴욕 런던 도쿄의 외환선물시장을 넘나들며 30억엔 매입,5백만마르크 매각 등 화려한 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이 무렵 지나친 자신감은 오만함으로 바뀌었다.

실적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동료에게 독방 사무실을 내줘야 했고 비서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새로운 비즈니스를 개척하지 않은 데 따른 자업자득이었다.

덕분에 단기·중기·장기로 나눠 비즈니스 일기를 써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인간관계의 중요성도 깨닫기 시작했다.

"It''s not what you know,It''s who you know(무얼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굴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다)"였다.

80년대 후반 이후엔 미국시장의 조류가 채권 주식 등으로 급속히 바뀌면서 자연스레 이 부분으로 옮겨 가게 됐다.

한국시장에 거래가 많던 97년,IMF가 또 한번의 위기를 가져다 줬지만 용케 살아남았다.

지난 23년간의 치열했던 월가 생존기는 현재 페인웨버에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