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진성호는 황무석과의 전화통화를 끝낸 후 방금 전 무의식중에 한 말에 자신이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깨달았다.

침대에 다시 누운 진성호는 이미지와 함께 한 지난 2개월 동안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의 평온을 느꼈음을 상기했다.

항상 무엇에 쫓기듯이 살아왔는데,이미지를 만난 후 달라졌던 것이다.

그 평온함은 그가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그리고 행복을 확인하고 싶을 때 언제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듯이 그와 함께 있었다.

아니,그의 머릿속에,몸 속에,그가 가는 곳,그가 만나는 사람에게까지 항상 존재했다.

무엇이 그 평온함을 가져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자기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여자가 있다는 감정,침묵 속에나마 같이 있음으로 해서 여자를 행복하게 한다는 확신,그 여자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희열,무엇보다 이미지의 타고난 은은한 미소일 것이라고 진성호는 생각했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평온을 깨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진성호는 흐뭇한 감정에 젖어 어느새 잠이 들었다.

진성호가 잠이 깼을 때는 오후 4시 반경이었다.

그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세수를 하고 아파트를 나왔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백화점에 들러 검정양복과 넥타이를 사서 입었다.

진성호가 탄 차는 6시쯤에야 삼성의료원 정문을 들어섰다.

진성호는 영안실 앞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일단 화장실로 갔다.

일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평소에 느낀 빈소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는 경건한 분위기보다는 장터의 경박함이 느껴졌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위선이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아 그는 쓴미소를 지었다.

문득 정치계,관계에서 유별나게 좋은 자리만 옮겨다닌 어느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처세술은 신문의 부고란을 매일 아침 빠짐없이 읽고 저녁 6시 이후의 일과는 상가를 순회하면서 소일하는 것이었다.

신문의 부고란에 날 정도의 상가면 문상을 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별볼일 없는 자의 상가에 가면 ''의리의 사나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수단이 되고,영향력 있는 자의 상가에서는 상주와 ''눈도장''을 찍는 목적 외에 그곳에 온 자들과 자리를 같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도 알리고 때에 따라서는 소주의 취기 속에서 중요한 정보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과거 한때 8개월 동안 장관자리에 있었던 관계로 문상객이 모인 장소에서 장관님으로 호칭되는 것도 싫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 고급 자가용과 기사와 검정양복과 넥타이,1만원짜리 지폐 5장,10장,20장이 든 부의용 이중 봉투는 그 선배가 꼭 필요한 처세도구였을지 몰랐다.

진성호는 화장실을 나와 아내의 빈소가 마련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황무석이 그에게 다가왔다.

"좀 늦으셨습니다"

황무석이 결례한 아우를 탓하듯 의젓이 말했다.

"예,옷을 챙겨 입느라고요…"

"먼저 빈소를 지키시다가 문상객들을 둘러보시지요"

"그러지요"

진성호가 빈소에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