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오전 11시 서울 경동시장.

30여개 도매상이 밀집한 40여m의 과일상가 골목길에는 썰렁한 분위기만 감돈다.

지나가는 손님을 붙잡고 흥정하는 상인은 겨우 6명.

나머지 가게 상인들은 앉아 졸거나 신문을 보고 있다.

"3~4년 전만 해도 시장 골목마다 넘쳐나는 사람들로 장사하는 재미가 절로 났으나 이젠 지나간 영광일 뿐입니다"

4평짜리 가게인 서문상회 박효선(53)씨는 "점포를 유지하려면 하루에 80만원어치는 팔아야 하는데 요즘은 30만원 올리기도 힘들다"고 한숨을 내쉰다.

옆 가게에서 밤과 대추를 파는 상인은 "오늘 아침부터 아직 밤 한 되도 못팔았다"며 "매달 1백50만원씩 내야 하는 점포세를 감당못해 곧 장사를 접어야 할 것 같다"고 푸념한다.

서민들의 ''쇼핑천국''이었던 재래시장이 지난 97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이후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상인들의 절망감도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신당동 중부시장에서 18년째 건어물 장사를 해온 최관호(40)씨는 "요즘처럼 장사가 안된 적은 없었다"며 "이제 아이들 대학보낼 일이 걱정"이라고 말했다.

광장시장의 경우 잘 나가던 80년대 중반 연간 매출이 4조원에 이르렀으나 올해 2천억원에도 못미칠 것으로 추산된다.

값싸고 품질좋은 옷을 파는 ''패션벤처밸리''의 신화를 만들어 내며 재래시장 부활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동대문시장도 요즘은 중병에 시달리고 있다.

10여개의 대형 패션몰이 밀려드는 인파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뤘던 이곳에는 두산타워 밀리오레 등 일부 선두주자를 제외하고는 빈 점포가 수두룩하다.

지난 3월 문을 연 엠폴리스는 이미 전체 상인중 대부분이 장사를 포기, 점포 문을 닫았고 누죤도 곳곳에서 상점 셔터가 내려져 있다.

우노꼬레 프레야타운은 장사가 안돼 이미 부도를 맞은 상태다.

동대문 도매상가연합회는 현재 이곳 패션몰 점포공실률은 12%대로 2만8천여개의 점포 가운데 3천3백여개가 비어 있다고 밝힌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롯데백화점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쇼핑나온 시민들로 빼곡하게 차 있다.

국내 백화점에서 가장 큰 1만4천여평의 매장 면적을 자랑하는 롯데 본점은 오전 시간인 데도 지하 1층 식품매장부터 지상 9층 아울렛 매장까지 수많은 인파들로 가로막혀 통로를 지나기가 어려울 정도다.

상품권 매장의 권혜순씨는 "추석이후 경제위기설이 나오고 있으나 손이 달릴 정도로 바쁘다"면서 "불황의 기미를 전혀 못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숙녀정장 매장의 김정미 판매사원도 "지금까지는 매출이 줄어들 조짐이 없다"고 밝혔다.

요즘 롯데 본점에는 평일 20여만명, 주말에 30만명이 찾는다고 백화점측은 설명한다.

롯데 본점은 9월 매출이 1천2백억원으로 사상 최고 수준에 달하고 매출신장률은 30%선으로 상반기보다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강 건너 황금상권에 위치한 압구정동의 현대백화점 본점의 오후 시간.

지난 7월말 처음 문을 연 지하 1층 명품식품관은 수입 와인 치즈 차 등을 사려는 고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별로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쿠바산 시가(엽권련)가 하루에 20만~30만원어치 나가고 식도락가들이 찾는 이란산 캐비어는 공급이 달릴 정도다.

매장 관계자는 식품관의 하루 평균 매출만 1천만원이 넘는다고 귀띔한다.

뿐만 아니라 젊은 층의 인기가 높은 엠포리오 아르마니 브랜드의 수입 패션시계는 개당 가격이 30만~40만원인데도 요즘 ''불티''가 나고 있고 5백만원짜리 국산 모피코트도 하루 3~4벌씩은 꾸준히 팔린다는 것이다.

''명품 백화점''으로 자리를 굳힌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도 호황을 만끽하고 있다.

9월 들어서도 매출 신장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대비 25%선을 넘는다고 관계자는 밝힌다.

가격이 1백만원에서 비싼 것은 2백만원까지 나가는 카르티에 구치 루이뷔통 등 수입 브랜드의 핸드백 가을 신상품이 요즘 하루에 50~60개씩 팔려 나가고 있다.

와인숍 ''에노테카''의 경우 하루 평균 3백만원의 매출을 올려 연초 개점 이후 매달 20%씩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경기가 위축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중.상류층 이상의 소비자들에게는 불황이 별로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전형적인 ''소비양극화'' 현상이다.

빈부격차 확대와 더불어 경기를 직접 반영하는 실물 시장에서 이미 위기의 신호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민계층 소비기반의 얘기일뿐 부유층에겐 남의 나라 일이다.

일부 고소득 계층의 ''거품소비''가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음이 그것을 말해 준다.

최인한.최철규 기자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