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남북한 '민족의 恨' 풀기..하용출 <서울대 외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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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으로 합의를 본 남북 적십자회담에 이어 국방장관 회담,경제협력 실무접촉과 장관급 회담이 이번주중 잇따라 열린다.
흔히 한국인의 정서를 얘기할 때 한(恨)을 일컫는다.
한이란 여러가지로 이해될 수 있겠으나 아마도 크나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때 외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해결을 볼 수 없거나 풀지 않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러한 마음의 상처를 깊숙이 묻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묻어 둔다는 것은 억제한다는 것 일 뿐,완전한 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응어리가 소멸되지 않아 마음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채 마음의 저변에 심리적 휴화산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많은 한이 축적돼 오히려 한과 함께 사는 데 익숙한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을 푸는 것보다,한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자연스런 모습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사람이나 민족의 한을 공유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푸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성사된 지난 8월의 이산가족 상봉은 민족의 한이 가족의 한과 얼마나 밀접히 연관돼 있나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민족 분열의 한이 초래한 가족의 한은 우리에게 민족 분열의 아픔은 물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에 강렬하게 재생시켰다.
우리는 한말 이래 외세의 위압 속에 항상 민족의 혼연일치를 생존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일제는 독립과 자주를 상실한 우리에게 민족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아로 새기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우위의 당위성 속에는 민족 문중 대가족 핵가족 나 라고 하는 위계 질서를 강화 시켜,개인의 정체성은 항상 하위에 놓였다.
민족 분열의 비극은 민족 단결이라는 급박한 명제 앞에 우리의 전통적 가치와 제도를 은연 중에 강화시켰다.
민족이라는 미분화된 개념은 가족과 혈연이라는 피의 공동체를 그 바탕으로 했다.
해방 이후 단절과 6.25의 비극은 민족 분열의 아픔을 더욱 가중시켜 치유하기 어려운 한을 남겨 주었다.
이제 모든 것을 이루어도 민족 분열의 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완성감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번의 가족 상봉은 그 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한에서 비롯된 이산가족들의 한이 이들에게 인생의 성취감과 완성감을 반감시켜 왔음을 잘 보여주었다.
이들의 상봉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반복을 보았다.
혈연의 중요성을 내내 알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19세기 말 이래 지속된 민족의 한이 21세기에 와서도 전통적 가치를 강화시키면서 불필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았다.
한은 잠재적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
분단된 가족,민족과 국가는 항상 그 저변에 통합을 위한 한풀이의 에너지를 장착하고 있다.
세계 역사는 분단된 민족들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대응하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베트남 PLO 코소보 사태,나고르니-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갈등 속에서 그 최근의 사례를 볼 수 있다.
한이 품고 있는 부정적 에너지는 잘 관리되지 않는 한,불안정성의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생이별 속에서 이산 가족들이 살아온 시간들이 내뿜는 한의 에너지가 그 어찌 우리 사회에 긍정적이기만 했을 것인가.
21세기에서 보는 민족의 한과 가족의 한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역사의 이이러니와 다른 한편 연속성이었다.
21세기의 세계화를 부르짖는 우리의 경제적 현실 및 논리와는 별개로 아직 우리는 나뉘어진 피의 한을 풀어야 한다.
이것이 20세기를 잘못 출발한 우리 역사의 유산이자 이이러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를 풀려는 노력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연속성을 보게 된다.
21세기 문턱에서 진행되는,민족의 한을 풀려는 남북한 간의 각종 노력이 우리 역사의 이이러니와 연속성을 깰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흔히 한국인의 정서를 얘기할 때 한(恨)을 일컫는다.
한이란 여러가지로 이해될 수 있겠으나 아마도 크나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때 외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해결을 볼 수 없거나 풀지 않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러한 마음의 상처를 깊숙이 묻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묻어 둔다는 것은 억제한다는 것 일 뿐,완전한 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응어리가 소멸되지 않아 마음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채 마음의 저변에 심리적 휴화산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많은 한이 축적돼 오히려 한과 함께 사는 데 익숙한지도 모른다.
따라서 한을 푸는 것보다,한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자연스런 모습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사람이나 민족의 한을 공유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푸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성사된 지난 8월의 이산가족 상봉은 민족의 한이 가족의 한과 얼마나 밀접히 연관돼 있나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민족 분열의 한이 초래한 가족의 한은 우리에게 민족 분열의 아픔은 물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에 강렬하게 재생시켰다.
우리는 한말 이래 외세의 위압 속에 항상 민족의 혼연일치를 생존의 바탕으로 삼아왔다.
일제는 독립과 자주를 상실한 우리에게 민족의 중요성을 뼛속 깊이 아로 새기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우위의 당위성 속에는 민족 문중 대가족 핵가족 나 라고 하는 위계 질서를 강화 시켜,개인의 정체성은 항상 하위에 놓였다.
민족 분열의 비극은 민족 단결이라는 급박한 명제 앞에 우리의 전통적 가치와 제도를 은연 중에 강화시켰다.
민족이라는 미분화된 개념은 가족과 혈연이라는 피의 공동체를 그 바탕으로 했다.
해방 이후 단절과 6.25의 비극은 민족 분열의 아픔을 더욱 가중시켜 치유하기 어려운 한을 남겨 주었다.
이제 모든 것을 이루어도 민족 분열의 한이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완성감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번의 가족 상봉은 그 이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한에서 비롯된 이산가족들의 한이 이들에게 인생의 성취감과 완성감을 반감시켜 왔음을 잘 보여주었다.
이들의 상봉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반복을 보았다.
혈연의 중요성을 내내 알리는 상황에서 우리는 19세기 말 이래 지속된 민족의 한이 21세기에 와서도 전통적 가치를 강화시키면서 불필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았다.
한은 잠재적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
분단된 가족,민족과 국가는 항상 그 저변에 통합을 위한 한풀이의 에너지를 장착하고 있다.
세계 역사는 분단된 민족들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대응하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베트남 PLO 코소보 사태,나고르니-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갈등 속에서 그 최근의 사례를 볼 수 있다.
한이 품고 있는 부정적 에너지는 잘 관리되지 않는 한,불안정성의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생이별 속에서 이산 가족들이 살아온 시간들이 내뿜는 한의 에너지가 그 어찌 우리 사회에 긍정적이기만 했을 것인가.
21세기에서 보는 민족의 한과 가족의 한이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역사의 이이러니와 다른 한편 연속성이었다.
21세기의 세계화를 부르짖는 우리의 경제적 현실 및 논리와는 별개로 아직 우리는 나뉘어진 피의 한을 풀어야 한다.
이것이 20세기를 잘못 출발한 우리 역사의 유산이자 이이러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를 풀려는 노력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연속성을 보게 된다.
21세기 문턱에서 진행되는,민족의 한을 풀려는 남북한 간의 각종 노력이 우리 역사의 이이러니와 연속성을 깰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