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서울대 병원 구내를 걸어가는 진성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혜정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꼭 감은 이혜정의 두 눈에서 배어나오던 눈물…자꾸 그 장면이 떠오르며 가슴속에서 통증이 일었다.

그녀의 눈물은 그가 준 상처가 곪아터진 아픔의 결정체임을 진성구는 알고 있었다.

진성구가 정문에 다다랐을 때 반대편 쪽에서 걸어오는 이성수의 모습이 보였다.

몹시 반가웠다.

반년만에 죽마지우를 만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날 밤 혼자 기나긴 밤을 지샐 자신이 없었다.

진성구는 검게 탄 얼굴에 흰 이빨이 유난히 드러나는 이성수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성수의 체취에서 아프리카의 건강한 햇살과 오염되지 않은 대기의 신선함이 물씬 풍겨왔다.

"혜정씨는 어때?" 이성수가 물었다.

"많이 나아졌어"

"지금 볼 수 있을까?"

이성수의 물음에 진성구가 고개를 저었다.

진성구가 앞장서 걸어갔다.

그들은 근처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그곳 한쪽에 자리를 잡고 소주에 돼지족발을 안주로 시켰다.

"뮤지컬 개막공연 반응은 어땠어?"

이성수가 물었다.

"아주 좋았어"

자신의 표정을 이성수가 유심히 살피는 듯 해 진성구는 고개를 들고 미소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슬픈 미소이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방금전 한 여인,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하였던 여인이 보여준 잔인함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소주병과 잔이 탁자에 놓이자마자 진성구는 서너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이성수가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탁자에 다시 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이성수의 물음에 그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혜정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어?"

이성수가 다시 물었다.

진성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집안에 무슨 병고라도 있었어?"

진성구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성수가 진성구 앞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럼 한잔 더 해.소주 두 잔을 더하면 다섯 잔이야.다섯 잔이면 어느 남자에게나 마음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주지"

진성구가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비우고 소주병을 들고 있는 이성수 앞에 내밀었다.

이성수는 그가 내민 잔을 채웠다.

진성구가 다시 들이켰다.

"화장실에 갔다 올게"

이성수가 자리를 떴다.

혼자가 된 진성구는 연거푸 들이킨 다섯 잔의 소주가 과다한 전작이 있어서인지 자신의 위장을 뒤집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두 팔로 아랫배를 움켜쥐며 마음속으로 그 고통이 더해지기를 바랐다.

고통이 심해지면서 순간 뱃속에서 뭔가 목구멍으로 울컥 치밀어 올라옴을 느꼈다.

그는 아랫배를 두 팔로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술집 밖으로 뛰어나온 그는 그곳 담벼락에 기대어 토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부축하며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시원하게 다 토해버려"

이성수의 말이 등뒤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