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최형식은 18년 전 아내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그때 그는 법망을 피해다니느라 세월을 보냈지만 그토록 많이 집을 비웠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내의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았다.

아내가 그때 한 말이 다시 들려왔다.

"당신이 존경하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지금 다 어디 있어요?

한두 번 법정에 선 것 외에는요..

그 중 많은 사람은 지금 정치인이 되어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잖아요.

당신 같은 사람은 고생만 하고요"

"아니야.그렇지 않아.

그 사람들은 정치판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일을 하는 거야"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당신 같은 사람들이 희생하는 동안 자기 실속을 채운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진짜 노동자 같아요?

노동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마르크스도 평생 노동해본 적이 없는 철학자야.

그러나 그의 짤막한 글인 공산당 선언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고 있어.

결국 세계는 프롤레타리아,즉 무산대중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뀔 거야.시간 문제야"

"무산대중이라고 하셨어요?..그들도 무산대중이 아니에요.

비록 물질적인 재산은 없더라도 훌륭한 학벌이 있고 학연이 있어요.

언제라도 원하면 잘살 수 있어요.

우리처럼 평생 동안 배운 단순한 기술 하나로 생업을 삼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당신,나를 단순한 선반공으로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줄 알아?

우리 고향에서 최고의 선비집안이었고 부농집안이었어.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었어.

아버지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사상운동을 하다가 집안이 몰락해 내가 대학을 못 간 거야.

아버지가 그렇게 남을 위해 고생하실 때 일본사람들이나 해방 후 관리들에게 아첨을 떤 자 집안의 자식들이 대학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가 지금 큰소리를 치고 있는 거야"

"당신도 이제는 한 가정을 돌보아야 할 가장이에요.

돌아가신 아버님이 우리 가족을 돌볼 순 없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어.지금 북한에서 대접을 받고 잘살고 계실 거야.언젠가 아버지를 꼭 만나뵐 거야"

그들 부부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잠시 후 아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당신, 왜 우는 거야?"

"임신을 했어요. 곧 우리가 돌봐야 할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저 혼자 힘으로는 벅차요"

아내가 18년 전 울음 속에서 한 말이 바로 어제 일처럼 최형식의 귀에 들려왔다.

그는 아내가 한 말이 진실이었음을 이제는 깨달았다.

그는 그 후에도 가정을 돌보지 않고 노동운동에 전심전력을 기울였었다.

그래서 아내는 혼자서 힘들게 동혁이를 키웠고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동혁이는 대학입시에 실패하여 결국 군에 입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신이 사회의 하류층 직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듯이 동혁이도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자신은 불행한 인생을 산 것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어쩌면 목적이 뚜렷한,고통스러웠지만 행복한 인생을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목적은 이데올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