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인생여정의 중간 혹은 종착점에 이르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설사 뒤돌아보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천벌을 받게 되거나 달려온 길이 고통스러워도,현재의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면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은 더욱 강렬할 것이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갑년을 넘긴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필자도 끊임없이 추구하고 사색해왔지만 결코 아름다움을 감상할 만큼 넉넉함을 지니지는 못한 아쉬움이 더 크다.

생각하고 추구해온 영역이 사회과학분야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마음이 빌 만큼 여유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니엘 벨이 말하는 "문화적 측면에서 자아실현 내지 자아확인을 할 만큼 여유가 없었던 사람"이라고 아쉬워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스스로 깊은 반성을 할 수 있는 시점에서,한국은행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획한 "근대 미술의 한 단면-한국은행 소장품을 중심으로"의 덕수궁 전시(4월20일~6월20일)가 필자에게는 미술품을 통한 자아확인의 계기가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필자 스스로 메마르게 살아왔던 삶을 뒤돌아볼 수 있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근세사중 근대화의 싹이 텄던 때부터 비극사였던 식민지시대 그리고 광복후 개발과정까지 191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일찍 깨인 수많은 미술가가 그린 역작을 공공기관인 한국은행이 깊은 애정과 의식을 지니고 수집 보관해 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평가받을 만 하다.

더구나 국민들에게 감상할 기회를 주게 된 것은 필자처럼 넉넉함이 없는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번 전시회에는 한국은행이 소장한 미술품 총 1천2백46점 가운데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 외 미술전문 교수 세분이 엄선한 72점을 전시하고 또 화집을 만들었다.

전시목록 가운데는 김인승의 "봄의 가락""문학소녀",도상봉의 "풍경",심형구의 "수변",윤중식의 "가을풍경",노수현의 "산수",이상범의 "야산귀로",장우성의 "신황",허백련의 "선경"등 우리 근대미술사의 독보적인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화집 "아름다운 그림들과 한국은행"(한국은행.국립현대미술관 편저,한국은행 발행)에는 정준모씨의 "한국 공공 콜렉션의 의미와 전망",윤범모 교수의 "20세기 한국 유화와 한국은행 소장미술품",홍선표 교수의 "한국 근대 수묵채색화의 역사-동양화에서 한국화로"의 해설논문을 국.영문으로 수록했다.

단순한 화집이라기보다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해설하여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알찬 감상을 가능하게 했다.

여기에 전시된 그림별로 작가약력과 그림의 성격을 역시 국.영문으로 해설하였고 전시그림을 천연색으로 수록했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와 화집은 그동안 한국은행이 수집소장하였던 그림을 통해 격동기였던 근.현대사에서 남긴 우리민족의 아름다움을 뒤돌아보고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줄 것으로 믿는다.

현재 우리는 토마스 만이 "할아버지 세대에는 경제를,아버지 세대에는 정치를,그리고 우리의 시대에는 문화를 추구한다"고 했던 것처럼 1960년대,70년대의 압축경제성장 시대로부터 80년대의 암울했던 정치의 시대를 지나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97년에 맞게 된 IMF(국제통화기금)의 한파는 이러한 욕구와 행동양태를 일거에 잠재우는 파괴력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다가왔다.

그래서 우리는 얼어 붙었던 위기를 탈출하고 다시 넉넉함을 되찾을 수 있는 스스로의 위대한 힘이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곧 문화와 예술의 힘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