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럽연합(EU)간 해묵은 과제인 조선 협상이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지난 16일 브뤼셀 협상에서는 양측이 합의문 작성까지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막판에 깨지고 말았다.

합의문 초안을 본 EU 조선업계 관계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해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이었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정말 힘든 싸움"이라며 협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양측 대표단은 합의를 원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통상마찰의 발단은 지난 98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접어들면서 한라중공업 대동조선 등 부도난 국내 조선업체들의 해외영업이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환율상승과 구조조정으로 가격 경쟁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최근 6개월간 유럽에서 한국조선업계의 시장점유율은 50%를 넘어섰다.

부실화된 현지 조선업체들이 잇따라 도산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거리로 쫓겨난 실업자와 가족들은 연일 도크에 몰려나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불만은 간단하다.

"한라나 대동같이 이미 부도처리된 업체들이 어떻게 경쟁업체들보다 30%나 낮게 응찰할 수 있느냐"는 것.

한국정부가 IMF 자금을 불공정하게 지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EU 협상단도 이런 업계의 주장에 난감해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우선 EU 스스로 조선업계에 보조금을 주고 있다.

게다가 한국 정부가 은행들이 "상업적 판단"에 따라 조선업계의 부채를 탕감해 주거나 출자로 전환하고 있다고 주장, 한국 정부를 무턱대고 공략할 수는 없는 처지다.

우리도 난감한 상황이다.

코앞에 총선을 앞두고 있어 "통상마찰"이니 "시장개방"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면 좋을리 없다.

총선전에는 되도록 통상문제를 가능한한 조용히 처리한다는 원칙이어서 이번 협상에서 많은 양보안을 내놓았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상황은 양측 협상 당사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유럽 조선업계는 한국을 EU 집행위는 물론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업계의 이해와 정치적 상황이 얽힌 한-EU 조선협상에서 양국 정부가 어떤 묘수를 찾을지 궁금하다.

박수진 경제부 기자 parksj@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