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1917~1995)은 음악가로서는 위대했지만 한평생을 고난속에서 보낸
불행했던 인물이다.

그의 젊은 시절은 집을 나가 방랑하고 일제에 반항해 옥살이를 하고
음악교사로 민족정신을 심어주고 전쟁고아들을 모아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민족의 수난과 궤를 같이한 고통스런 세월이었다.

그가 초지를 되찾아 음악을 위해 독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40세때였다.

망향과 고독과 싸우며 학비마련에 고생하면서도 그는 세계적 작곡가가
되어 78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1백50여곡에 달하는 협주곡 오페라 교향곡
등의 작품을 남겼다.

"나의 음악은 나의 조국 속에서 태어났고 나의 조국은 나의 음악을 그 자식
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더 풍요한 음악을 낳을 수 있는 소지를 만들 것"
이라던 생전의 말처럼 그가 남긴 작품의 정신적 알맹이나 표현에는 구석구석
우리 민족의 감성이 짙게 깔려 있다.

초기작품에 우리민족의 선적인 미를 추구해 오다가 소위 "동베를린 사건"의
상처가 개인 감정에서 순화되던 때인 75년 무렵부터는 "인간성탐구"로 작품의
경향을 바꿨다는 것이 그가 남긴 증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유럽신문들은 그를 "아시아와 서유럽을 잇는 다리를
놓은 위대한 독일-한국인 작곡가"로 평가했다.

그러나 윤이상은 결코 독일인이 아니라 끝까지 민족의 자유 화합을 추구한
한국인 예술가였다.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윤이상의 고향인 통영에서 열렸던 통영현대음악제
는 "윤이상을 그리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을 처음 공인하는 선언적 의미를 지닌 음악제였다.

음악제를 성공리에 끝낸 통영시는 2002년부터는 국제현대음악제로 키우고
윤이상기념관을 짓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국제윤이상협회도 동참하는 사업이다.

윤이상은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였다.

그가 근 40년을 그렇게도 그리던 고향에서 국제현대음악제가 개최되기
시작해 통영이 모차르트 음악제가 열리는 잘츠부르크처럼 유명해진다면
"상처받은 용"의 한도 풀릴 것같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