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87)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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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자유지역 공식 발표 ]
마산수출자유지역 추진만큼 관민협력이 잘 된 프로젝트도 드물성 싶다.
당시 정부는 민간 경제계의 안을 전폭 수용했다.
정부관리들은 세부계획 수립, 법안작성 등 전경련 직원들과 밤을 새워가며
힘을 합쳤다.
그 중에서도 경제기획원 김학열 부총리, "자유지역관리청" 정문도 초대
청장에 대해 특기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 부총리는 69년 6월 취임초 필자와 만나자고 했다.
사실 김 부총리와의 관계는 61년 말 5.16군사정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부총리는 경제기획원 기획조정관, 필자는 내각 기획통제관실
기획조정관이었다.
매월 갖는 각 부처 기획조정관으로 구성된 "기획조정위원회"에서 나라살림을
놓고 젊은 혈기에 넘쳐 갑론을박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하는 사이가 됐다.
김학열씨는 성미가 칼날같고 불같은 험구가였다.
그러니 별명과 일화가 붙어다녔다.
깡마른 몸체로 "쓰루(일본어로 학)"라는 별명과 함께 "가미소리(면도칼)",
상하구분없이 토해대는 욕설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부총리실에 들어가니 친근감있게 말을 건넸다.
"김형이 임해공업벨트 구상을 착안한 모양인데 저에게 설명해 주시면
해서... 박 대통령께서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필자는 생각을 정리할 짬을 가지면서 실내를 살폈다.
마침 벽에는 세계지도와 한반도 지도가 걸려있었다.
지도에 다가서면서 입을 연다.
"보시다시피 한반도는 세계교통 정보통로에 훨씬 쳐지고 빗나간 변방에
위치하고 있소. 이 지정학적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임해공업벨트를
구상하게 된 것이요"
필자는 옆에 있는 한반도 지도에서 포항 부산 여수 목포에 이르는 임해공업
벨트 구상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지역에 첫단계로 수출자유지역을 설정해서 원자재는 세계에서 제일 싼
지역으로부터 구하고 다시 제품은 세계시장으로 수출하자는 구상이오"
"다음은 이 지역에서부터 경제행위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나 규제를 완전
배제하자는 것이오. 이것이 기업하기 가장 좋은 지역, 말하자면 한국의
홍콩화를 이루는 원대한 구상의 첫단계요"
김 부총리는 머리회전이 빠른 인물이다.
필자가 설명하는 동안 완전 몰입자세를 취했다.
"서면으로 된 구체안이 있소"
"여기 있습니다"
필자는 "전경련 경제.기술 조사센터"가 작성한 임해수출산업자유지역설립
제2차 구상건의를 내민다.
김 부총리는 "이 수출자유지역에 외국기업이 들어올 것 같소" "그 점은
앞으로의 제도와 운영 여하에 달려 있겠지만 이미 일본 미국 등은 투자유치단
을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면서 추진하는구먼"
김 부총리는 흡족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필자가 일어서려고 하니 "김 부회장, 한가지 부탁이 있소. 경제운영 전반에
대한 의견교환의 회합을 매월 2회 정도 가지려고 하는데 김 형도 그 멤버가
돼 주었으면 하오. 이학열(작고) 고대 교수, 배수근 감독원장을 우선 고정
멤버로 하고, 그때 그때 문제별로 추가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필자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정부 정책마저 반대할 수 있는 완전 자유의견개진이 보장돼야 할 것이오"
이로부터 약 1주일 뒤인 69년 7월2일 김 부총리는 수출자유지역 추진을 공식
발표했다.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70년 1월1일 "설치법", 3월13일에는 "수출자유지역 관리청직제"가 대통령령
으로 각각 공포됐다.
초대관리 청장에는 정문도 기획원 운영차관보가 임명됐다.
필자는 정문도씨가 초대 청장으로 임명되자 우선 안도했다.
아무리 탁월한 구상과 제도를 만들어도 관리 부실로 잘못된 경험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 청장은 외국어에 능통하고 활달한 성품, 친화력, 추진력을 겸비해 최적격
인물이었다.
후에 현대건설 사장으로 이름을 내외에 날렸고, 필자와는 지금도 가끔
회고를 가끔 나누고 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7일자 ).
마산수출자유지역 추진만큼 관민협력이 잘 된 프로젝트도 드물성 싶다.
당시 정부는 민간 경제계의 안을 전폭 수용했다.
정부관리들은 세부계획 수립, 법안작성 등 전경련 직원들과 밤을 새워가며
힘을 합쳤다.
그 중에서도 경제기획원 김학열 부총리, "자유지역관리청" 정문도 초대
청장에 대해 특기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 부총리는 69년 6월 취임초 필자와 만나자고 했다.
사실 김 부총리와의 관계는 61년 말 5.16군사정부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부총리는 경제기획원 기획조정관, 필자는 내각 기획통제관실
기획조정관이었다.
매월 갖는 각 부처 기획조정관으로 구성된 "기획조정위원회"에서 나라살림을
놓고 젊은 혈기에 넘쳐 갑론을박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하는 사이가 됐다.
김학열씨는 성미가 칼날같고 불같은 험구가였다.
그러니 별명과 일화가 붙어다녔다.
깡마른 몸체로 "쓰루(일본어로 학)"라는 별명과 함께 "가미소리(면도칼)",
상하구분없이 토해대는 욕설로도 이름이 나 있었다.
부총리실에 들어가니 친근감있게 말을 건넸다.
"김형이 임해공업벨트 구상을 착안한 모양인데 저에게 설명해 주시면
해서... 박 대통령께서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필자는 생각을 정리할 짬을 가지면서 실내를 살폈다.
마침 벽에는 세계지도와 한반도 지도가 걸려있었다.
지도에 다가서면서 입을 연다.
"보시다시피 한반도는 세계교통 정보통로에 훨씬 쳐지고 빗나간 변방에
위치하고 있소. 이 지정학적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임해공업벨트를
구상하게 된 것이요"
필자는 옆에 있는 한반도 지도에서 포항 부산 여수 목포에 이르는 임해공업
벨트 구상지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지역에 첫단계로 수출자유지역을 설정해서 원자재는 세계에서 제일 싼
지역으로부터 구하고 다시 제품은 세계시장으로 수출하자는 구상이오"
"다음은 이 지역에서부터 경제행위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나 규제를 완전
배제하자는 것이오. 이것이 기업하기 가장 좋은 지역, 말하자면 한국의
홍콩화를 이루는 원대한 구상의 첫단계요"
김 부총리는 머리회전이 빠른 인물이다.
필자가 설명하는 동안 완전 몰입자세를 취했다.
"서면으로 된 구체안이 있소"
"여기 있습니다"
필자는 "전경련 경제.기술 조사센터"가 작성한 임해수출산업자유지역설립
제2차 구상건의를 내민다.
김 부총리는 "이 수출자유지역에 외국기업이 들어올 것 같소" "그 점은
앞으로의 제도와 운영 여하에 달려 있겠지만 이미 일본 미국 등은 투자유치단
을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앞을 내다보면서 추진하는구먼"
김 부총리는 흡족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필자가 일어서려고 하니 "김 부회장, 한가지 부탁이 있소. 경제운영 전반에
대한 의견교환의 회합을 매월 2회 정도 가지려고 하는데 김 형도 그 멤버가
돼 주었으면 하오. 이학열(작고) 고대 교수, 배수근 감독원장을 우선 고정
멤버로 하고, 그때 그때 문제별로 추가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필자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정부 정책마저 반대할 수 있는 완전 자유의견개진이 보장돼야 할 것이오"
이로부터 약 1주일 뒤인 69년 7월2일 김 부총리는 수출자유지역 추진을 공식
발표했다.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70년 1월1일 "설치법", 3월13일에는 "수출자유지역 관리청직제"가 대통령령
으로 각각 공포됐다.
초대관리 청장에는 정문도 기획원 운영차관보가 임명됐다.
필자는 정문도씨가 초대 청장으로 임명되자 우선 안도했다.
아무리 탁월한 구상과 제도를 만들어도 관리 부실로 잘못된 경험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 청장은 외국어에 능통하고 활달한 성품, 친화력, 추진력을 겸비해 최적격
인물이었다.
후에 현대건설 사장으로 이름을 내외에 날렸고, 필자와는 지금도 가끔
회고를 가끔 나누고 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