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호 < (주)코오롱 사장 jhjo@mail.kolon.co.kr >

"물품대금 떼 먹으려는 거래선을 밤 열두시까지 집앞에서 몰래 기다렸다가
멱살을 잡고 안방으로 끌고 들어가 잠도 안재우고 열시간 동안 으름장을 놓은
끝에 대금의 절반과 집문서를 빼앗아 왔다"

이런 무용담을 늘어놓는 열혈 사원을 보는 경우가 많다.

반면 평소 아무런 극적인 이벤트없이 그저 평범히 영업을 잘하는 이도 있다.

그에게는 밤샘할 일도, 남의 집에 쳐 들어가 목청을 높일 일도 없다.

그저 물흐르듯 주문받고, 제품 공급하고 대금 회수하면 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 사람은 별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박력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행동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다.

거래를 틀 때 신용조사를 철저히 했고 또 매달 거래선의 움직임을 표시
안나게 지켜보다가 사건발생 훨씬 이전에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출장을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치자.

전자는 이것 저것 생각없이 일단 떠나고 본다.

행동이 무척 민첩하고 적극적이며 앞뒤를 재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역에 도착한 그는 곧 기차표가 매진임을 알게 되고 그제서야
김포공항으로 이동하는 등 부산을 떤다.

후자는 명령을 받으면 먼저 정보부터 재빨리 챙긴다.

기차편, 항공편, 고속도로 상황 등을 점검하고 표를 예매한 뒤 출발한다.

전자보다 출발은 느렸지만 아무 문제없이 훨씬 먼저 도착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예를 흔치 않게 본다.

물론 생각하고 계획하느라 출발조차 못하는 "기획 전념통"이 있기는 하다.

정말 유능한 사람은 어떤 사안이 벌어지면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바둑 두듯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여섯 수 둬 본다.

그리곤 병목 지점, 넘기 힘들다고 생각되는 난관을 미리 조치하는 민첩함을
보인다.

그래서 막상 그 일이 현안으로 떠오를 때는 모든 조치가 취해진 상태라
아무 일 없는듯 평탄하게 지나간다.

소리는 별로 안 나지만 물 흐르듯 일처리를 하는 유능한 인재를 제대로 발굴
육성해야 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2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