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마켓] (1) 한경다우 전면개편 :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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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다우지수는 17년 전인 1983년 첫선을 보였다.
10년 후인 1993년(기준시점 1990년1월4일)의 부분적인 손질을 거쳐 이번에
대대적으로 개편됐다.
기준시점은 맨처음 1980년1월4일에서 1990년1월4일, 이번에 2000년1월4일로
바뀌었다.
기준시점으로 보면 10년마다 새롭게 재편된 셈이다.
한경다우지수가 제정된 이후 한국 주식시장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산업구조가 변모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을 대표하는 종목들도 당연히 자리바꿈을 했다.
주식시장의 흐름을 보다 현실감있게 나타내기 위해선 지수 개편이 불가피
했다.
두차례에 걸친 개편에서 한경다우지수는 지수산출에 필요한 채용종목의
수를 조절해 대표성을 높였다.
채용종목 변경으로 연속성에 다소 문제가 나타났으나 기존의 채용종목을
최대한 살림으로써 이를 보완했다.
상장기업의 합병이나 상장폐지 때는 예비종목으로 즉각 교체토록 시스템을
갖추었다.
한경다우지수가 제정된 1983년에는 화학 조립금속 건설 음식료 금융 섬유
등의 순으로 상장기업이 많았다.
따라서 처음 등장한 다우지수는 이들 업종에 속하는 종목 위주로 구성됐다.
건설주 파동으로 침체를 지속하던 주식시장은 80년대 후반들어 다시 활황세
를 탔다.
이와함께 공기업의 민영화 작업은 전국민의 주주화를 꾀하는 국민개주화
붐을 일으켰다.
싯가총액이 전체의 10%를 넘는 한국전력과 같은 거대기업이 상장되는 등
기업공개 열풍이 불었다.
개미군단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일반투자자들이 주식시장
으로 몰려들었다.
80년대 중반까지 3백개를 웃돌던 상장기업은 90년말 6백69개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건설 도매(무역) 금융등 이른바 "트로이카주"가 시장을 주도했다.
주식시장의 이같은 구조변화는 한경다우지수의 개편을 요구했다.
주가수준을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서는 채용종목의 조정이 불가피했다.
한국경제신문은 1993년 한경다우지수를 처음으로 손질했다.
한경다우지수가 탄생한 지 10년만이다.
1993년1월4일부터 새로 발표된 다우지수는 우선 채용종목수를 이전보다
10개 적은 70개로 줄였다.
상장기업 전체의 10분의1 정도였다.
기준시점도 1980년1월4일에서 1990년1월4일로 변경했다.
90년대 들어 주식시장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경제성장률 저하와 더불어 80년대 후반의 거품 소멸로 약세로 출발했다.
특히 92년 주식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인들의 주가 결정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외국 자금에 의해 주식시장이 되살아났다.
내재가치를 중시하는 투자 풍토가 자리잡았다.
외국 자금 유입에 힘입어 오르락내리락하던 주식시장은 97년 말 국제통화
기금(IMF) 체제라는 복병을 만났다.
이에 따라 94년 11월 1,100선까지 상승했던 종합주가지수는 98년 6월
200선까지 떨어지는 침체국면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98년 말부터 경기회복과 더불어 주식시장이 급성장했다.
또 국제화의 진전에 따라 주가가 미국 주가와 연동되는 동조화 현상이
심화됐다.
99년 후반 미국 나스닥시장의 급성장은 국내시장에서 정보통신관련주와
인터넷 관련주를 뜨겁게 달궜다.
한편 대우그룹 붕괴등 재벌기업들의 잇따른 몰락과 금융기관의 퇴출은
대마불사라는 투자자들의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에 따라 주식시장 대표주자들의 자리에도 변화가 일었다.
국민주인 포항제철이 싯가총액 5위 밖으로 밀려나는 등 극심한 변동이
나타났다.
또다시 한경다우지수의 개편이 요구됐다.
상장기업의 수적인 증가를 감안해 채용종목을 70개에서 1백개로 30개
늘렸다.
기준시점은 2000년1월4일로 바꿨다.
이날을 100으로 새롭게 출발한 한경다우지수는 뉴밀레니엄의 중요한
투자지표가 될 것이다.
< 김홍열 기자 comeon@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7일자 ).
10년 후인 1993년(기준시점 1990년1월4일)의 부분적인 손질을 거쳐 이번에
대대적으로 개편됐다.
기준시점은 맨처음 1980년1월4일에서 1990년1월4일, 이번에 2000년1월4일로
바뀌었다.
기준시점으로 보면 10년마다 새롭게 재편된 셈이다.
한경다우지수가 제정된 이후 한국 주식시장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산업구조가 변모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을 대표하는 종목들도 당연히 자리바꿈을 했다.
주식시장의 흐름을 보다 현실감있게 나타내기 위해선 지수 개편이 불가피
했다.
두차례에 걸친 개편에서 한경다우지수는 지수산출에 필요한 채용종목의
수를 조절해 대표성을 높였다.
채용종목 변경으로 연속성에 다소 문제가 나타났으나 기존의 채용종목을
최대한 살림으로써 이를 보완했다.
상장기업의 합병이나 상장폐지 때는 예비종목으로 즉각 교체토록 시스템을
갖추었다.
한경다우지수가 제정된 1983년에는 화학 조립금속 건설 음식료 금융 섬유
등의 순으로 상장기업이 많았다.
따라서 처음 등장한 다우지수는 이들 업종에 속하는 종목 위주로 구성됐다.
건설주 파동으로 침체를 지속하던 주식시장은 80년대 후반들어 다시 활황세
를 탔다.
이와함께 공기업의 민영화 작업은 전국민의 주주화를 꾀하는 국민개주화
붐을 일으켰다.
싯가총액이 전체의 10%를 넘는 한국전력과 같은 거대기업이 상장되는 등
기업공개 열풍이 불었다.
개미군단이라는 말이 유행어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일반투자자들이 주식시장
으로 몰려들었다.
80년대 중반까지 3백개를 웃돌던 상장기업은 90년말 6백69개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건설 도매(무역) 금융등 이른바 "트로이카주"가 시장을 주도했다.
주식시장의 이같은 구조변화는 한경다우지수의 개편을 요구했다.
주가수준을 정확히 반영하기 위해서는 채용종목의 조정이 불가피했다.
한국경제신문은 1993년 한경다우지수를 처음으로 손질했다.
한경다우지수가 탄생한 지 10년만이다.
1993년1월4일부터 새로 발표된 다우지수는 우선 채용종목수를 이전보다
10개 적은 70개로 줄였다.
상장기업 전체의 10분의1 정도였다.
기준시점도 1980년1월4일에서 1990년1월4일로 변경했다.
90년대 들어 주식시장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경제성장률 저하와 더불어 80년대 후반의 거품 소멸로 약세로 출발했다.
특히 92년 주식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인들의 주가 결정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외국 자금에 의해 주식시장이 되살아났다.
내재가치를 중시하는 투자 풍토가 자리잡았다.
외국 자금 유입에 힘입어 오르락내리락하던 주식시장은 97년 말 국제통화
기금(IMF) 체제라는 복병을 만났다.
이에 따라 94년 11월 1,100선까지 상승했던 종합주가지수는 98년 6월
200선까지 떨어지는 침체국면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98년 말부터 경기회복과 더불어 주식시장이 급성장했다.
또 국제화의 진전에 따라 주가가 미국 주가와 연동되는 동조화 현상이
심화됐다.
99년 후반 미국 나스닥시장의 급성장은 국내시장에서 정보통신관련주와
인터넷 관련주를 뜨겁게 달궜다.
한편 대우그룹 붕괴등 재벌기업들의 잇따른 몰락과 금융기관의 퇴출은
대마불사라는 투자자들의 믿음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에 따라 주식시장 대표주자들의 자리에도 변화가 일었다.
국민주인 포항제철이 싯가총액 5위 밖으로 밀려나는 등 극심한 변동이
나타났다.
또다시 한경다우지수의 개편이 요구됐다.
상장기업의 수적인 증가를 감안해 채용종목을 70개에서 1백개로 30개
늘렸다.
기준시점은 2000년1월4일로 바꿨다.
이날을 100으로 새롭게 출발한 한경다우지수는 뉴밀레니엄의 중요한
투자지표가 될 것이다.
< 김홍열 기자 comeon@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