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시간여행 (하)] 국제 경제질서 .. 'WTO 우산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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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세계경제는 점진적인 무역자유화와 국제무역 규범의 강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관세및 수입금지와 제한(쿼터제)등 무역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장벽이
낮아지거나 폐지됐다.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주요 국가간 무역장벽은 점점 높아졌었다.
불황이 세계경제에 몰아닥치면서 각국은 환율인상 경쟁과 더불어 수입관세를
올리고 수입금지및 제한조치를 취하기에 바빴다.
미국의 경우 1차세계대전 직전 21%였던 평균 관세율이 20년대 중반 35%로
높아졌다.
29년의 대공황때는 42%까지 높아졌다.
이같은 보호무역 여파로 세계 무역규모는 급감했다.
29년초 월 30억달러에 달했던 세계 교역액은 33년초에는 월 9억달러에
불과했다.
거의 3분의 1로 격감한 것이다.
보호무역 강화는 국제교역침체를 낳았고 교역침체는 세계경제를 위축시켰다.
이에따라 2차대전후 세계 주요국들은 하바나헌장을 계기로 국제무역기구
(ITO)를 만들어 국제무역질서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가 뒤얽혀 ITO설립은 불발되고 말았다.
대신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48년 체결됐다.
GATT의 탄생은 많은 국가들이 참여하는 국제무역질서가 최초로 형성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역부문의 GATT는 금융부문의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전후 국제경제체제
의 기둥이 됐다.
GATT의 기본정신은 무차별 원칙이다.
서로 다른 회원국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최혜국대우"조항및 국내로
수입된 외국상품과 국내상품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내국민 대우"조항이
바로 그것이다.
GATT는 또 관세율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관세양허,
무역수량 제한의 원칙적 금지 등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조항들을 담았다.
GATT의 기능중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다자간 협상이라는 것이다.
다자간 협상은 회원국들이 함께 모여 관세율 인하나 철폐,기타 무역정책을
협의하는 것이다.
GATT아래서는 8차례의 국제무역자유화협상이 이뤄졌다.
특히 케네디라운드와 도쿄라운드는 대폭적인 관세인하로 큰 성과를 올렸다.
30년대 40%에 달했던 주요 선진국의 평균관세율이 90년대말에는 4%선으로
낮아졌다.
전통적인 보호무역 수단이었던 관세율의 하락은 관세 이외의 보호무역
조치인 비관세장벽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미국은 GATT가 허용하는 보호무역 조치인 반덤핑관세와 상계관세
부과를 통한 수입규제를 강화했다.
비관세장벽을 낮추기 위한 GATT의 노력은 70년대말 도쿄라운드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이렇다할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86년9월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에서는 관세나 반덤핑은 물론 그동안 다루지
못했던 투자 무역 지식재산권 농업등 새로운 이슈들을 논의했다.
그러나 GATT룰 안에서는 서비스 지식재산권 등 새로운 통상문제들을 효과적
으로 다루기 어려웠다.
GATT는 관세인상 수입수량할당 수출보조금 등을 금지시켜 최혜국 대우를
상호 인정한다는 단순한 제도였다.
이 때문에 국제무역확대에 따른 각종 문제를 통제하고 조정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무역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중재하고 해결하는 기능이 없었다.
이에따라 95년1월 GATT를 흡수한 세계무역기구(WTO)가 탄생했다.
WTO의 최대 특징은 일방적인 무역제재를 하지 못하도록 해 국제무역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있는 점이다.
비록 WTO하의 첫 다자간 국제무역협상이 될 뉴라운드가 예정대로 출발하지는
못했지만 이는 시기가 늦추어진 것뿐이다.
GATT에서 WTO체제로 넘어오는 동안 국제교역체제는 보호무역주의가 약해지고
자유무역주의가 강해졌다.
자유무역주의는 세계 경제성장의 밑거름이다.
지난 50년동안 세계교역 규모는 18배로 늘어났다.
현재 연간 세계무역액은 상품이 4조5천억달러, 서비스가 1조5천억달러에
이른다.
< 박영태 기자 pyt@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1일자 ).
수 있다.
관세및 수입금지와 제한(쿼터제)등 무역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장벽이
낮아지거나 폐지됐다.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주요 국가간 무역장벽은 점점 높아졌었다.
불황이 세계경제에 몰아닥치면서 각국은 환율인상 경쟁과 더불어 수입관세를
올리고 수입금지및 제한조치를 취하기에 바빴다.
미국의 경우 1차세계대전 직전 21%였던 평균 관세율이 20년대 중반 35%로
높아졌다.
29년의 대공황때는 42%까지 높아졌다.
이같은 보호무역 여파로 세계 무역규모는 급감했다.
29년초 월 30억달러에 달했던 세계 교역액은 33년초에는 월 9억달러에
불과했다.
거의 3분의 1로 격감한 것이다.
보호무역 강화는 국제교역침체를 낳았고 교역침체는 세계경제를 위축시켰다.
이에따라 2차대전후 세계 주요국들은 하바나헌장을 계기로 국제무역기구
(ITO)를 만들어 국제무역질서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가 뒤얽혀 ITO설립은 불발되고 말았다.
대신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48년 체결됐다.
GATT의 탄생은 많은 국가들이 참여하는 국제무역질서가 최초로 형성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역부문의 GATT는 금융부문의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전후 국제경제체제
의 기둥이 됐다.
GATT의 기본정신은 무차별 원칙이다.
서로 다른 회원국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최혜국대우"조항및 국내로
수입된 외국상품과 국내상품을 차별대우하지 않는다는 "내국민 대우"조항이
바로 그것이다.
GATT는 또 관세율을 일정수준 이상으로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관세양허,
무역수량 제한의 원칙적 금지 등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조항들을 담았다.
GATT의 기능중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다자간 협상이라는 것이다.
다자간 협상은 회원국들이 함께 모여 관세율 인하나 철폐,기타 무역정책을
협의하는 것이다.
GATT아래서는 8차례의 국제무역자유화협상이 이뤄졌다.
특히 케네디라운드와 도쿄라운드는 대폭적인 관세인하로 큰 성과를 올렸다.
30년대 40%에 달했던 주요 선진국의 평균관세율이 90년대말에는 4%선으로
낮아졌다.
전통적인 보호무역 수단이었던 관세율의 하락은 관세 이외의 보호무역
조치인 비관세장벽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미국은 GATT가 허용하는 보호무역 조치인 반덤핑관세와 상계관세
부과를 통한 수입규제를 강화했다.
비관세장벽을 낮추기 위한 GATT의 노력은 70년대말 도쿄라운드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이렇다할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86년9월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에서는 관세나 반덤핑은 물론 그동안 다루지
못했던 투자 무역 지식재산권 농업등 새로운 이슈들을 논의했다.
그러나 GATT룰 안에서는 서비스 지식재산권 등 새로운 통상문제들을 효과적
으로 다루기 어려웠다.
GATT는 관세인상 수입수량할당 수출보조금 등을 금지시켜 최혜국 대우를
상호 인정한다는 단순한 제도였다.
이 때문에 국제무역확대에 따른 각종 문제를 통제하고 조정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무역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중재하고 해결하는 기능이 없었다.
이에따라 95년1월 GATT를 흡수한 세계무역기구(WTO)가 탄생했다.
WTO의 최대 특징은 일방적인 무역제재를 하지 못하도록 해 국제무역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있는 점이다.
비록 WTO하의 첫 다자간 국제무역협상이 될 뉴라운드가 예정대로 출발하지는
못했지만 이는 시기가 늦추어진 것뿐이다.
GATT에서 WTO체제로 넘어오는 동안 국제교역체제는 보호무역주의가 약해지고
자유무역주의가 강해졌다.
자유무역주의는 세계 경제성장의 밑거름이다.
지난 50년동안 세계교역 규모는 18배로 늘어났다.
현재 연간 세계무역액은 상품이 4조5천억달러, 서비스가 1조5천억달러에
이른다.
< 박영태 기자 pyt@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