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보는 아일랜드인의 시선은 곱지 않다.

아일랜드인의 가슴엔 12세기 영국왕 헨리2세의 침입 이후 8백여년간 지속된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한 응어리가 남아 있다.

20세기초 남아일랜드가 에이레란 나라이름으로 독립한 뒤에도 두 나라간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17세기 영국의 신교도(성공회)가 집단이주한 얼스터(북아일랜드)지방의
독립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됐다.

IRA(북아일랜드공화군)와 정치적 대변자인 신페인당은 무차별 폭탄테러를
벌였고 영국은 공수부대까지 동원해 보복하는 등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졌다.

그 끔찍한 피의 대결은 70~80년대에 극에 달했다.

두나라 정부는 얼스터지방을 영국의 지배아래 두되 완전한 자치권 부여와
신.구교도의 평등대우를 골자로한 방안을 들고 협상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지난해 4월 평화협정이 타결됐다.

그러나 이 지역의 뿌리깊은 신.구교도 갈등은 늘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다.

12월 4일 개봉되는 영화 "더 복서"( The Boxer )는 얼스터지방의 갈등해소
방안을 모색한다.

편가르기와 폭력이 아닌 화합의 미덕을 강조한다.

더블린 출신의 감독 짐 쉐리단과 영국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나의
왼발"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이어 세번째로 어울렸다는 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대니보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뭇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대니(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벨파스트로 돌아 온다.

IRA의 폭탄테러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14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한
귀향이다.

벨파스트는 그러나 술렁댄다.

대니의 연인이었던 매기(에밀리 왓슨)가 IRA 조직대장인 아버지 조
(브라이언 콕스)의 뜻에 따라 수감중인 대니의 친구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남자가 수감중인 조직원의 아내에게 말을 건네는 것조차
금기시한다.

대니가 매기에게 접근하면 결딴낼 태세다.

대니는 매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가슴에 묻고 황폐해진 복싱연습장을
재건한다.

대니는 이제 분파주의에서 벗어나려 한다.

연습장이 제모습을 갖추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한다.

신교도와 구교도가 어울리는 화합의 분위기가 피어난다.

폭력만을 앞세우는 조직의 행동대장 해리(제럴드 맥솔리)는 그런 대니를
못마땅해 한다.

사사건건 대니의 일을 방해하며 목숨을 위협한다.

그런 가운데 대니와 매기는 서로에 대한 식지 않은 사랑을 확인한다.

남의 눈을 피해 위험한 만남을 지속한다.

전형적인 복싱영화의 틀에 북아일랜드의 현실과 두 남녀의 로맨스를 절묘히
버무려 넣었다.

폭력적 대응을 대변하는 행동대장 해리에 맞서 화합과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
대니의 의지는 복싱에 녹아 있다.

사각의 링은 정해진 규칙에 따른 공정한 게임을 의미하며 링 주변의 환호는
분파주의의 타파를 은유한다.

조직대장 조가 대니를 처치하려는 해리에게 총구를 돌리는 장면으로 폭력의
종식을 역설한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진지한 연기를 보는 것 만으로도 즐겁다.

이 영화의 모델인 복서 배리 맥기건과 함께 연습해 찍은 권투시합 장면도
사실적이다.

대니에 대한 사랑과 사회적 분위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매기역의 에밀리
왓슨도 호연이다.

< 김재일 기자 kjil@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