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로 구일렌 < 미국 와튼스쿨 교수 >

구조기능주의 역사유물론 등 전세계가 일정한 방향으로 수렴할 것이라고
주장하던 사회이론들은 대체로 실패로 끝났다.

각국의 기업지배구조가 앵글로색슨형 모델로 수렴할 것이라는 90년대의
주장도 이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경제가 불황에 빠지기 전인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미국형
기업지배구조가 전세계의 모범사례라고 생각했다.

80년대 일본과 독일의 경제력이 급부상하자 이들 국가의 모델이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90년대 금융시장의 자유화와 미국경제의 부활로 사정은 또 바뀌었다.

미국형 지배구조의 우수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특정한 모델이 최선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매우 위험
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금융시장의 자유화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기업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주주권리가 극대화되는 쪽으로 기업지배구조가 수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금융시장 자유화와 지배구조의 수렴화는 상관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투자자들의 입장에선 지배구조의 다양성이 포트폴리오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메뉴중의 하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론적 차원에서 기업지배구조의 세계적인 수렴화는 어렵다.

무엇보다 각국의 법적.제도적 차이가 지배구조의 수렴을 어렵게 할 것이다.

기업지배구조는 은행제도 노동시장 세제 경쟁법 정부규제 등 각국의 고유한
제도들과 상호연관관계 속에서 발전한다.

기업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이들 제도들이 가까운 미래에 하나의 형태로
수렴될 수는 없다.

기업지배구조가 세계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 기업들이 선택하는 고유의
경쟁전략과 더불어 발전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기업들은 초국적 기업의 모범사례(best practice)를 모방하지만 그 수용정도
는 전략적 판단과 고유한 문화적 전통에 따라 변용되기 때문에 기업지배구조
역시 획일화될 수는 없다.

지배구조를 해결하려는 각국의 다양한 노력에 따라 이들이 세계경제에
참여하는 방식이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독일기업의 이원적 이사회는 정교한 기술을 체화한 근로자들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었고 이는 독일을 기술집약적인 기계공업 화학산업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가전 자동차 등 아이디어와 기술의 결합에 장점을 보인 일본경제는 일본식
계열구조에 의해 뒷받침됐다.

미국이 소프트웨어 금융 생명공학에서 우위를 보이는 것도 개인주의와
기업가정신을 강조한 문화적 전통이 자본시장과 주주중심의 지배구조를
낳았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은 자본집약적 산업에서 재벌이라는 거대그룹을 형성한 기업지배
구조와 사회구조 덕분에 자동차 화학 가전 철강과 같은 수출지향적인 대량
생산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한가지 수렴화 주창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기업지배구조와 소유구조
가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지난 25년간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공통의 기준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유럽연합은 대표적인 본보기다.

기업지배구조를 수렴시키는 것은 정치적 노력일 뿐이지 시장의 자연스런
요구는 아니다.

기업지배구조가 영.미식으로 수렴할 것이라는 주장은 실증적인 근거로도
반박된다.

단적인 예로 앵글로색슨형의 법률체계를 갖고 있는 국가들의 해외투자액은
지난 80년 세계 해외투자액의 66%에서 97년 50%수준으로 하락했다.

반면 독일 프랑스 계통의 법률 전통을 가진 국가들의 해외투자 비중은 같은
시기 34%에서 49%로 증가했다.

앵글로색슨계 국가의 해외투자 비중이 감소함에도 미국형 기업지배구조가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상장기업의 주주구성을 봐도 앵글로색슨형 국가에서는 개인주주의 주식소유
비중이 매우 높지만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식 법률 전통에 있는 국가들은
개인 주주의 비중이 작다.

기업지배구조가 수렴할 것이라는 주장은 적대적 기업인수의 발생빈도로도
충분히 반박된다.

적대적 기업인수는 90년대 들어 8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실질거래가치 기준으로 80~89년 사이에 전세계 적대적 기업인수의 약 94%가
미국과 영국에서 나타났고 90년대 이후에도 이 비율은 79%에 이른다.

최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적대적 기업인수 사례가 증가하고 있지만
절대적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이같은 경험지표들은 기업지배구조의 차이가 국가나 기업의 경제적 성과와
밀접한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업지배구조는 장기적인 경제성장률이나 기업의
주요 재무제표와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처럼 기업지배구조가 세계적으로 수렴된다는 주장은 이론적으로나 실증적
으로 아직 분명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의 의의는 각국의 기업들이 국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다양한
모델을 추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세계화는 기업지배구조를 단일한 모범사례로 수렴시키기보다는
기업간 차별화를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자본의 국제화가 진전된다 해도 지배구조 모델은 그 사회의 법적전통
사회제도 발전경로에 따라 영향받기 때문이다.

결국 성장에 적합한 각국 고유의 지배구조가 최선임을 인식해야 한다.

< 정리=박민하 기자 hahaha@ked.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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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에서 격주 단위로 e메일을 통해
제공되는 "Knowledge@Wharton"에 실린 마우로 구일렌 교수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