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를 옮긴뒤 근무여건이 한결 나아졌는데 피로도는 더 심해졌다는 환자가
찾아왔다.

잠을 설치고 기괴한 꿈을 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찜찜하다고 한다.

자세히 상담해 보니 아내와의 다툼 때문임이 드러났다.

부서를 옮긴데 대해 아내는 "한직으로 밀려난게 아니냐"며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발끈하면서 잠재돼 있던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증상
이었다.

그는 내성적인데다 사소한 일에도 좌절을 느낄만큼 예민한 성격이다.

상사에게 고분고분 복종하고 지적을 받으면 화를 속으로 삭이는 스타일이다.

아내가 툭툭 내던지는 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다 지쳐 이제 "침묵"
으로 일정거리를 두는 상태다.

집 안팎 어디에서도 정신적인 위안을 찾을만한 데가 없는 것이다.

제때 풀지 못한 억눌린 감정은 약한 암반을 만나면 터져 나오는 화산과
같은 생리를 갖고 있다.

그동안에는 일에 쫓기며 분주하게 지낸 것이 좌절로 생긴 공격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완충시키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직장에 적응이 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참아 왔던 인간적 갈등에
휘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면 직장 가정을 향해 불만이 생기고
세상만사가 귀찮게 여겨진다.

현실은 냉정하다.

아무리 불평 불만을 쏟아낸다 해도 세상과 주변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바뀔리 없다.

이럴땐 과거의 얽매인 감정을 누군가에게 편안히 털어놓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자기반성도 필요하다.

억눌린 감정을 눅여주는 과감한 자기용서도 중요하다.

불만스런 생각이나 감정을 완곡하게라도 제때제때 표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화를 풀지 않고 쌓아두면 죄책감만 생기고 자신을 파괴한다.

그래서 자기용서는 더욱 필요하다.

피로해진 뇌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약물치료도 병행돼야 한다.

신승철 < 남서울병원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