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엽 < 전남대 교수 / 경제학 >

어린 시절, 가을 운동회에는 모든 학년이 참가하는 4백m 이어달리기가
있었다.

청군에는 일찍이 이름난 달리기 선수가 들어있었다.

백군이었던 우리 반 아이들은 이어달리기는 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고
푸념했다.

선생님께서는 "게임의 결과보다는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 규칙에 따라
열심히 하는 것이 값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감명을 받았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로 이루어진 한국이 부정부패 면에서 세계의
"선진국"이라 한다.

외국 전문조사기관의 조사 결과라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이 결과가 마침 국제적으로 부패라운드가 힘을 얻고 있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 정도를 알기 위해서 외국 조사기관의 발표까지 인용할
이유가 없다.

공무원 비리에 관한 기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중매체를 장식한다.

시내에 나가서 일을 볼때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지만 안 된다고 할 경우
사례를 하면 그만한 대가가 돌아온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대부분 공무원과 관련된 비리를 다루지만, 부정한
거래는 그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청업체와 하청업체, 시공업체와 감리업체, 그리고 납품업자와 구매업체의
담당자들 사이에는 나타난 거래 이외에 또 다른 큰 거래가 있다.

부정과 부패의 만연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

또 타인의 인격을 중시하는 시민의식이 모자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가 나에게 좋으면 그만인 것이다.

일하는 과정에서 정도를 벗어났을 때 갖는 개인적인 염치와 죄의식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자신에게 주는 결과의 화려함에만 관심을 갖는 개인적인 행태와 태도는
어디서 비롯됐는가.

과정의 정당함에는 관심이 없고 결과로만 판단하려는 사회적인 인식의 산물
아닌가.

전통사회를 떠받치던 도가 도시화된 익명사회가 되면서 사라져버린 게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시장경제의 장점은 희소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다.

그 시장경제는 경쟁을 전제로 한다.

경쟁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정보와 게임 룰이 경기참여자에게 투명해야 한다.

그 룰이 제대로 지켜져야 함은 물론이다.

게임 룰이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각종 변칙이 생겨난다.

이때 경기참여자들은 경기보다는 모의와 협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 과정에 에너지와 노력을 집중 투입한 결과 게임의 성과는 이긴 팀이라
할지라도 작을 수밖에 없다.

경기 결과에 승복하는 것도 힘들어진다.

정보를 더 많이 보유한 사람들은 각종 도덕적 해이와 역선택을 보임으로써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우리 사회는 시장경제가 그 장점을 제대로 살리기에는
한계가 많다.

믿을 만한 제품을 정당한 가격에 거래하고, 계약을 차질없이 이행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참여자가 큰 성과를 거두는 사회에서 시장경제가 꽃피울 수
있다.

좋은 물건을 제때 공급하기 위해 열중하기보다는 상대방에 관한 정보를 얻고
자신의 불리한 정보를 숨기기 위해 고급 술집을 전전하며 밤늦은 시간까지
근무해야 하고, 힘있는 사람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갖은 묘안을 짜내 실행에
옮기는 용의주도함을 보여야 하는 우리 경기참여자들이 본 게임을 잘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부정부패를 줄이는 일과 시장경제가 제 기능을 하게 하는 것은
동일한 일이 된다.

무엇보다도 정보가 거래 쌍방에게 보다 많이 제공되도록 하고 게임 룰과
게임 과정을 투명하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회인식은 교사들에 의한 교실 교육에 의해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교육기관의 힘을 온실에서 거스르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실제 이미 진학과 취업을 위한 교육기관이 돼버린 학교에서는 시험부정행위
가 번성하고 있는 형편이다.

오히려 부정부패를 줄이는 일은 거대한 사회에서 하는것이 효과적이다.

예를 들면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높고 문맹률이 낮은 한국에서 기장이
어렵다는 이유로 간이세금납부자가 인정되고, 그것을 빌미로 이뤄지는
무자료거래가 지속되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다.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고자 정책적 사업으로 추진중인 신용카드 이용확대
사업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투명한 세정으로 힘 또는 정보의 우위가 약화될 것을 염려한 이익집단이
스스로의 목을 누르는 일을 기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 yysohn@chonnam.chonnam.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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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퍼듀대 경제학박사
<>저서:시카고학파의 경제학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