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철 사장은 다른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사무실 한쪽에 책상을 놓고
일을 본다.
책상 옆에 손님용 소파가 놓여있는 것이 굳이 따진다면 직원 것과 다른 점.
연간 매출액 2백50억원(99년 추정)규모 회사의 오너가 일하는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대용산업은 최근 전북 익산의 모업체 공장을 인수, 생산시설을 2배로 늘리는
작업에 돌입했다.
중견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건 이 회사에 영업전무실이 있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다.
"영업전무는 바이어들을 자주 만나야하는 분이니까요"(정희철 사장)
이처럼 상당수 우량 중소기업에서는 사내에서 최고의 권위자로서 군림해오던
사장이 바뀌고 있다.
번듯한 사장실을 거부하고 사장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 기업인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들어 창업열기가 폭발하면서 속출하고 있는 대학생 창업기업에서
이같은 변화의 움직임이 뚜렷하다.
<> 사장실이 없다 =대용산업외에도 사장실이 없는 중소기업은 수두룩하다.
경기도 안양 아파트공장에서 방진마스크를 생산하는 에버그린의 이승환
사장.
월50만개의 안면부 여과식 마스크를 생산하면서 외산이 장악해온 이 시장에
한국산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주역이다.
이 회사의 공장 겸 사무실을 들어서면 왼편에 별도의 사무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 사장과 사무직원 2명이 함께 일하고 있는 곳이다.
별도의 사장실이 없는 것이다.
40여명의 종업원을 둔 동아전기프러그의 이흥세 사장도 사장실이 따로 없다.
전무 총무과장 등과 함께 쓰는 별도의 방이 있을 뿐이다.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데 사장실이 무슨 필요 있느냐"는 게 이 사장의
설명이다.
대학생 창업 기업인 비젼넷의 장항배 사장도 그렇다.
중앙대 공대건물의 실험실에서 11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것.
사천에서 초고압파이프를 만드는 세우에도 사장실이 없다.
전무실은 있다.
이 회사의 박해술 사장은 사무실을 직접 돌며 결재를 한다.
<> 사장을 사장으로 부르지 말라 =반디볼펜으로 히트를 쳐 유명해진
세아실업의 김동환 사장 명함에는 사장이란 글귀를 찾아볼 수 없다.
"책임사원"이라는 특이한 문구가 인쇄돼있다.
김 사장이 명함을 바꾼 것은 오래되지 않는다.
작년 12월부터다.
중소기업청으로부터 벤처기업으로 확인받은 때였다.
김 사장은 "실패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질테니 직원들에게 마음껏
도전하라고 독려하는 차원에서 명함을 교체했다"고 말했다.
뉴화인화장품에는 "사장님"으로 불리는 사람이 없다.
김영수 전무가 회사를 이끌고 있다.
이유가 매우 특이하다.
"하나님이 사장님이기 때문"(이 회사 관계자).
김 전무는 신앙이 깊은 교회 집사다.
이 회사는 전국의 교회를 대상으로 화장품을 팔고 있다.
계측장비 수입업체인 세광물산의 법적인 대표이사는 김대준씨다.
그러나 그의 명함에는 해외영업1팀장이라는 문구만이 찍혀있다.
전력기기업체인 케이디파워의 박기주 사장 명함에는 이사로 기록돼있다.
부지런히 뛰어야 하는데 사장이라고 거들먹거릴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게
박 사장이 밝히는 이유다.
통신소프트웨어 업체인 블루버드소프트에는 사장으로 불리는 사람이 없다.
이장원 사장이 있지만 30여명의 직원들은 그를 팀장으로 부른다.
직원들과 함께 소프트웨어 개발에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팀장으로 부르기가
편하다고 한다.
염색폐수처리장치 상용화를 추진중인 비드테크의 류선종 사장.
서울대 대학원생인 그와 함께 일하는 7명의 직원들은 그를 "형"이라고
호칭한다.
실험실 후배들이기 때문에 사장으로 부르는 게 모두에게 어색하다는 것.
<> 뉴밀레니엄 리더의 모습 =이같은 변화가 작은 몸짓일 수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 기업문화가 지배하는 수직형 구조로는 기업환경이 빛처럼
빨리 변하는 광속경제에서 생존하기 힘들다는 현실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시하고 관리하려는 리더에서 함께 호흡하고 봉사하는 뉴밀레니엄 리더로의
변신인 것이다.
수평적인 기업구조에 적합한 리더가 늘고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다.
< 오광진 기자 kjo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