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놓고 나의 의견을 비웃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조사를 해도 소니 워크맨이 성공하리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혀 새로운 개념의 신제품에 대해 시장조사는 무의미했다".

(주위에서 시장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며 반대하는 워크맨 개발을 지시하며)

"큰 회사가 할 수없는 일을 해 기술의 힘으로 조국의 부흥에 이바지하자".

(소니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을 창립하면서)

"미국회사처럼 보수가 이익금과 연결돼 있으면 경영자들이 "몇 년후 내
자리에 안게 될 후임자를 위해 오늘의 나의 이익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식 경영자 보수체계가 근시안적이며 회사경쟁력을 상실케할 수있다며)

"긴 안목으로 본다면 기업과 기업의 미래는 종업원들에게 달려 있다.

보다 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기업의 미래는 실제로 가장 나이어린 신입사원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서전에서 사원중시를 강조하며)

"저런 상태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양질의 노동력을 얻어낼 수
있는가.

저들이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있는 상사들에게 어떻게 충성을 보일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일리노이주의 한 TV조립공장을 둘러본 후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해)

"전쟁직후 무일푼이었던 일본의 눈에 비친 미국은 거인같았습니다.

일본인들은 거대한 미국이 자유롭게 일본으로 잠식해 들어오면 즉시 시장을
압도할 것이라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가 이런 공포심리를 갖고 있는 한 자유화에 거부감을
느낄 것입니다".

(69년 미국 상.하원 경제청문회에서 일본의 자유화가 부진함을 지적하는
의원질문에 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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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 아키오의 일생 ]

<> 일본 나고야시 출생 (1921년)
<> 나고야 제8고교 이과 졸업
<> 오사카제국대학 이학과
<> 요코즈카 해군항공기술연 (1945년)
<> 도쿄통신공업 창업 (1946년)
<> 도쿄 고텐야마로 본사 이전 (1947년)
<> 가메이 요시코와 결혼 (1951년)
<> 소니로 회사이름 변경 (1958년)
<> 소나자회사 뉴욕증시 상장(1970년)
<> 사장 취임 (1971년)
<> 회장 취임 (1976년)
<> 워크맨 개발 (1979년)
<> 게이단렌 부회장 (1986년)
<> 외무상 취임 요청 거절 (1993년)
<> 게이단렌 회장 내정 (1994년)
<> 뇌출혈 이후 일선 퇴임 (1994년)
<> 도쿄시내 병원에서 사망 (1999년)

[ 소니 현황 (1998년) ]

<> 매출액 5백31억5천만달러
<> 순익 14억달러
<> 자산규모 5백31억8천만달러
<> 종업원 17만7천명
<> 포천 5백대 기업순위 30위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