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 "가난" "질병"...

우리나라 노인 실태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대다수의 노인들이 재력과 건강을 잃고 관심마저 받지 못한채 쓸쓸하고
고된 말년을 보내고 있다.

그들에겐 "삶의 질"이 관심거리가 아니다.

"생존"이 문제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게 급선무다.

오래 사는게 오히려 죄가 돼 버렸다.

선진국의 노인들은 "황금세대(Golden age)"를 구가하고 있다.

일본 경제기획청은 "고령 신인류"를 주창하고 나섰다.

소비능력과 집단적인 파워,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고루 갖춘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예고하는 말이다.

새 밀레니엄에선 노인이 주역이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노인의 해".

오는 10월2일은 "노인의 날"이다.

닷새 앞으로 다가왔지만 번듯한 행사 하나 거론되지 않고 있는게 우리
노인 모시기의 실상이다.

선진국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신노인의 위상과 휑하니 다녀가는 자식
에게 "설날에도 내려 올거냐"고 묻는 우리의 어버이상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추석연휴 이튿날이다.

무엇보다 노인들을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가정으로부터의 소외다.

이제 효자나 효부열전은 전설에만 남아 있다.

거리를 헤매는 노인들을 추적하면 아들 딸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산업사회가 몰고온 "변화"라기엔 너무나 몰인정한 "추락"이다.

30년전만 해도 자녀와 떨어져 사는 노인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그러나 작년말 조사에선 노인 혼자나 노부부만 사는 가구가 전체의 20.9%로
늘었다.

가정에서 "왕따" 당한 가정의 주인이 30년 사이에 3배로 늘어난 것이다.

지난 81년만 해도 3세대가 같이 사는 집이 69.1%나 됐었다.

이 비율이 98년에는 26.4%로 급감했다.

몸이나 성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를 보면 노인의 87%가 만성퇴행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자식이 아니라 당뇨 고혈압 관절염 등이 그들을 부여잡고 있다.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하는 중증 와상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만도 38만명에
달한다.

다른 질환까지 치면 65세이상의 노인 3백20만8천명중 35%가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는 일상생활이 곤란한 지경이다.

그나마 재력도 없다.

노인의 55.4%는 한달에 20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생계를 연명하고 있다.

한달에 40만원이상 쓸 수 있는 노인은 12%에 불과하다.

노인들의 치료비는 젊은이들에 비해 2.5~5배나 된다.

하지만 당장 먹고 자는게 급한 마당에 몸 아픈 것 쯤은 그냥 넘어갈 수
밖에 없다.

한 대학이 서울 탑골공원을 찾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더
끔찍한 결과가 나왔다.

4%가 하루에 한끼의 식사로 때우고 있었다.

두끼로 넘기는 노인들도 10%나 됐다.

전국적으로 42만명의 노인이 끼니를 거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노인 7~8명중의 하나 꼴이다.

이들중에는 아들딸과 함께 살지만 "밥만 축낸다는 말을 들을까봐 급식소를
찾는다"는 노인도 적지 않았다.

국내 65세이상 노인중 경제적으로 자활능력을 가진 노인은 60만여명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정부가 맡아주는 것도 아니다.

올해 전체 예산중 노인복지에 배정된 재원은 고작 0.25%.

선진국이 연금과 건강 등 노인문제에 전체 예산의 4~7%를 쓰고 있는데
비하면 천양지차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원년인 내년에도 별로 달라질게 없다.

내년도 보건복지분야 예산중 노인들의 경로연금 몫으로 책정된 재원은
0.06%에 불과하다.

경로연금이라는게 고작 한달에 2만~5만원이다.

라면값도 안된다.

시설이 미흡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국내 전체 노인복지시설은 유료와 무료를 합쳐 2백1개소.

여기에서 1만3천여명의 노인이 보호받고 있다.

전체 노인의 0.4%다.

국가로부터 생활보호자로 지정된 노인만도 24만9천명인데 무료로 보호받고
있는 노인은 8천8백명(3.5%)에 불과하다.

선진국의 얘기는 꺼낼 것도 없다.

보건복지 예산중 노인관련 예산이 20%를 넘는다.

나라마다 정부내에 노인문제를 전담하는 독립적인 기구가 있다.

정부가 못하는 일은 민간기업과 사회단체가 보충한다.

일본은 경제기획청이 작년에 발간한 노인백서에서 "평생현역사회"를
내걸었다.

평생일자리를 주겠다는 것이다.

감히 꿈도 못꿀 일이다.

물론 일찌감치 미래를 준비해 여생을 안락하게 즐기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나이에 아랑곳 없이 취미와 탐구로 행복을 누리는 노인들도 적지 않다.

재산은 없지만 봉사활동을 통해 남은 생애를 헌신하는 의미있는 삶을
보내기도 한다.

과제는 대다수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데 있다.

박재간 노인문제연구소장은 "노인들이 자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고 강조한다.

< 정만호 사회1부장 manh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