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매몰된 대만의 지진은 20세기 아시아 지역
최후의 참사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이웃 국가에서 그것도 과거 우리의 맹방이었던 나라의 참사에
대해 정부의 대응이 너무 소극적이다.

우선 한국정부는 대만정부에 아무런 애도와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아니 표시할 수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김종필 총리가 21일 밝힌 "애도와 위로"의 뜻은 개인적인 차원에 불과하다.

총리 명의의 조전은 대만정부에 전달되지 않았다.

사실상 "혼잣말"을 한 것에 불과하다.

조문을 받아들일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물론 한국과 대만의 국교관계가 단절돼 있어서다.

홍순영 외교통상장관은 "외교적으로 하나의 중국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지원 움직임도 더딘 것은 마찬가지다.

한국정부가 대만에 대한 공식적인 지원의사를 밝힌 것은 사건이 발생한지
16시간이 지난 후다.

대만적십자사를 통해 현금 7만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것과 119구조대를
파견하겠다는 것이 전부였다.

반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지진발생 직후
각각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달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물론 이같은 대응을 "현실적"이고 "실리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차피 중국이란 실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대만에 대한 적극적인 "손짓"은
중국의 심기를 건드린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더욱 문제다.

생명 인간 환경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엔 "외교적 실리"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

이를 인정하는 국가와 개인이 선진국이요 선진시민이다.

정작 중국조차도 지진 발생 이후 장쩌민 주석의 성명을 통해 신속하게
대만에 대한 지원의사를 밝혔다.

대만 지진참사의 파급력을 단지 국내 산업계의 반사이익 정도로 파악하는
시각도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우리의 삼풍참사나 성수대교 붕괴를 외국신문이 이런 태도로 보도했다면
어떤 감정일까.

21세기가 상품과 금융거래의 국경이 없어지는 글로벌시대임엔 분명하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경쟁의 글로벌화만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글로벌화,
인류애의 글로벌화가 아닐까.

남의 아픔을 진정 내 아픔으로 이해하는 성숙한 정부와 시민정신이 아쉽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외교"는 아직도 갈길이 멀다는 느낌이다.

< 이의철 정치부 기자 eclee@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