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를 기회로 살린 인생'' ]

김화순 < 대전시 서구 탄방동 >

중소 건설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어느날 갑자기 실직을 당했다.

남편 회사는 IMF 구제금융 이전 부도를 냈고 밀린 임금도 주지 못했다.

남편은 날마다 회사로 출근했지만 돈도 못받고 헛걸음질만 했다.

경제력을 잃은 남편의 얼굴은 날마다 핼쑥해져 갔다.

그래서 내가 두팔을 걷어 부치고 돈을 벌기로 했다.

며칠을 벼른 끝에 자존심을 꺾고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당장 아이들의 등록금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다급했기 때문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우유배달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새벽 찬바람은 몸은 물론 마음까지 얼어 붙게 만들었다.

더욱 어려웠던 것은 주변 사람의 눈길이었다.

궂은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던 나에게 쏟아진 시선은 너무나 따가왔다.

우유 배달을 하면서 손끝이 시리고 숨이 턱까지 찰 때면 나는 두 남매를
생각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런 나를 보고 "그깟 우유배달을 해서 얼마나 벌겠다고
야단이야"라고 빈정거렸다.

우유배달을 몇달 하면서 차츰 적응력이 생겼다.

우유배달만으로는 생활비와 아이들 학비를 충당하기에 턱 없이 부족했다.

신문배달을 새로 시작했다.

새벽 3시에 신문을 받아 아파트에 1백부씩 배달했다.

신문과 우유배달을 마치면 먼동이 터왔다.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 내릴때 쯤 집으로 돌아와 밥을 지어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아침을 준비할 때면 눈물이 나왔다.

이런 와중에 친한 친구로부터 새로운 제안이 들어 왔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등,하교시켜 주면 한달에 50만원 정도는 남는다는
것이었다.

친구가 어려운 처지를 생각해 승합차까지 빌려 준다고 하니 너무나
고마왔다.

남편 몰래 따둔 운전 면허증이 요긴하게 쓰였다.

아들과 딸의 도움으로 24인승 승합차에 21명의 학생을 구해 1인당 4만원씩
받으니 상당한 돈이 남았다.

일이라곤 해본게 없던 내가 어떻게 3가지를 한꺼번에 할수 있었는지 내가
생각해도 대견스러웠다.

나의 이러한 모습은 실의에 빠져 있던 남평에게 용기를 주었다.

죽어도 못끊겠다던 담배도 끊었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던 남편은 시골에 사는 친구 도움으로 오리와
닭을 키우기 시작했다.

농장 일부를 얻어 축사를 새로 짓고 소형 화물차도 구입했다.

축사 인근 학교에서 잔밥을 직접 구해와 사료와 함께 먹이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병아리 5백마리와 오리 5백마리를 사서 길렀다.

나는 배달일과 학생 등교일 이후 시간이 남으면 가축 사육도 도왔다.

하루가 25시간이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농장일이 자리를 잡자 나는 우유배달, 신문배달, 학생 수송만 전담했다.

씀씀이를 줄이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가전제품 사용을 아꼈다.

이웃과 폐식용유로 재활용 비누를 함께 만들고 바자회를 열어 못쓰게된
가전제품이나 작아진 옷가지 등도 교환했다.

남편은 가축 사육이 잘 되자 어느날 새로운 제안을 했다.

식당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육질이 좋은 닭과 오리를 직접 팔면 손님이 모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으로 시내에서 떨어진 변두리에 처갓집이란 이름으로
식당을 차렸다.

백숙 오리황토구이등 정성을 들여 키운 닭과 오리를 내다 파니 몇달만에
주변에서 알고 찾아 오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특히 황토구이 오리는 인기가 많았다.

식당의 부식도 시골 농토에서 직접 재배한 것을 썼다.

식당이 번창해져 이제는 배달을 그만두고 학생 수송일도 다른 사람에게
넘긴뒤 식당일만 하고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더 큰 희망을 갖고 산다.

비록 몸은 고달프지만 내가 노력한 만큼 돈을 벌수 있다는 자심감도 갖게
됐다.

한때 서울역 지하도에 노숙자가 넘치고 한끼를 때우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새롭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난관을 만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헤쳐 나갈수 있다.

IMF가 우리집에 보약이 됐다는 생각도 든다.

최근 한국경제가 조금 나아졌다고 다시 사치와 과소비를 일삼는 사람이
있다는 보도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아직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 요약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