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로씨 7일 귀국] (인터뷰) 박삼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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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석방을 끝내 못보고 돌아가신 어머니 박득숙씨의 소원을 사후에나마
이룰 수 있게 돼 한없이 기쁩니다. 권희로씨가 석방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권희로씨의 석방을 위해 지난 10년간 현해탄을 숱하게 넘나들었던 부산
자비사 박삼중 스님(57).
스님은 권씨의 귀국을 맞아 지난해 11월 92세를 일기로 한많은 인생을
마감한 어머니 박씨의 얼굴을 가장 먼저 떠 올렸다.
"30년 넘게 교화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자식 석방을 어머니만큼 기뻐할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희로 손잡고 조국 땅 부산으로 가서 여생을
보내며 뼈를 묻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박씨였는데..."
말끝을 채 잇지 못하는 삼중 스님은 그러나 박씨의 죽음이 결국 자식의
새인생을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음졸이며 보낸 지난 세월이 이제는 희열로 바뀌고 있다고 피력
했다.
스님이 권씨 석방운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 1월.
재일거류민단 관계자가 권씨 석방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제의를 해오면서부터
였다.
스님은 흔쾌히 받아 들였다.
그리고는 바다 건너 권씨를 몇차례 만났다.
당시만해도 권씨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데다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를 설득시키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자식 석방에 헌신적인 어머니 박씨를 만나 감동을 받고서는 권씨의
구명운동을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성과는 있었다.
"지난 90년7월 일본 중의원 하라 겐자부루 의장으로부터 "권씨가 곧
석방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권씨보다 어머니에게 먼저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박씨가 머물고 있던 가케가와 시립 양로원으로 달려
갔죠. 박씨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석방노력은 어이없이 실패로 돌아 갔다.
권씨가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계속되는 한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며 교도소내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실망감이 컸으나 석방시킬 수 있다는 스님의 의지는 확고했다.
때마침 조력자들이 나타나면서 석방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이 권씨 석방운동을 돕겠다며 일본
법무당국을 상대로 설득에 들어갔다.
그동안 5분정도에 그쳤던 면회시간도 3시간으로 늘어나 특별면회가
주어졌다.
스님은 이 자리에서 권씨에게 "살아 생전 아들과 고국땅을 밟고 싶다"는
어머니의 뜻을 전하며 석방을 위해 모범 수형생활을 해 줄 것을 당부했다.
특히 지난해 11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권씨의 수형생활은 몰라 보게
달라졌다.
처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털어 놓기도 했다.
평생의 유일한 빛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이 "김의 전쟁"을 한꺼번에 종식시킨
것이었다.
< 도쿄=김태현 기자 hyun11@ >
[ 약력 ]
<> 42년 서울출생
<> 58년 합천해인사 출가
<> 전국교도소 교화후원회장
<> 한일불교복지협회장
<> 한국화랑청소년육성회 총재
<> 저서 ''절망에서 배운인생'' ''인연이야기'' 등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7일자 ).
이룰 수 있게 돼 한없이 기쁩니다. 권희로씨가 석방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권희로씨의 석방을 위해 지난 10년간 현해탄을 숱하게 넘나들었던 부산
자비사 박삼중 스님(57).
스님은 권씨의 귀국을 맞아 지난해 11월 92세를 일기로 한많은 인생을
마감한 어머니 박씨의 얼굴을 가장 먼저 떠 올렸다.
"30년 넘게 교화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자식 석방을 어머니만큼 기뻐할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희로 손잡고 조국 땅 부산으로 가서 여생을
보내며 뼈를 묻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박씨였는데..."
말끝을 채 잇지 못하는 삼중 스님은 그러나 박씨의 죽음이 결국 자식의
새인생을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음졸이며 보낸 지난 세월이 이제는 희열로 바뀌고 있다고 피력
했다.
스님이 권씨 석방운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 1월.
재일거류민단 관계자가 권씨 석방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제의를 해오면서부터
였다.
스님은 흔쾌히 받아 들였다.
그리고는 바다 건너 권씨를 몇차례 만났다.
당시만해도 권씨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데다 우리말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를 설득시키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자식 석방에 헌신적인 어머니 박씨를 만나 감동을 받고서는 권씨의
구명운동을 위해 백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성과는 있었다.
"지난 90년7월 일본 중의원 하라 겐자부루 의장으로부터 "권씨가 곧
석방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권씨보다 어머니에게 먼저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박씨가 머물고 있던 가케가와 시립 양로원으로 달려
갔죠. 박씨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석방노력은 어이없이 실패로 돌아 갔다.
권씨가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계속되는 한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며 교도소내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실망감이 컸으나 석방시킬 수 있다는 스님의 의지는 확고했다.
때마침 조력자들이 나타나면서 석방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 정해창 전 법무부장관이 권씨 석방운동을 돕겠다며 일본
법무당국을 상대로 설득에 들어갔다.
그동안 5분정도에 그쳤던 면회시간도 3시간으로 늘어나 특별면회가
주어졌다.
스님은 이 자리에서 권씨에게 "살아 생전 아들과 고국땅을 밟고 싶다"는
어머니의 뜻을 전하며 석방을 위해 모범 수형생활을 해 줄 것을 당부했다.
특히 지난해 11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권씨의 수형생활은 몰라 보게
달라졌다.
처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털어 놓기도 했다.
평생의 유일한 빛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이 "김의 전쟁"을 한꺼번에 종식시킨
것이었다.
< 도쿄=김태현 기자 hyun11@ >
[ 약력 ]
<> 42년 서울출생
<> 58년 합천해인사 출가
<> 전국교도소 교화후원회장
<> 한일불교복지협회장
<> 한국화랑청소년육성회 총재
<> 저서 ''절망에서 배운인생'' ''인연이야기'' 등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