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 구나르 미르달 <1> ]

에릭 린달, 버틸 울린 등과 더불어 크누트 빅셀, 구스타프 캇셀 뒤를 이은
스웨덴학파 2세대 학자인 칼 구나르 미르달은 1898년 스웨덴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1927년 "경제적 변화과정 중의 가격결정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34~50년간 스톡홀름대학 경제학교수로 봉직했다.

사회주의자인 그는 사회민주당정권 하에서 경제사회정책과 관련된 고문직을
맡았다.

두차례에 걸쳐 국회의원도 지냈으며 스웨덴 중앙은행이사를 역임했다.

2차세계대전중에는 사회민주당 내각의 상무장관직을 맡았고 2차대전이 끝난
다음에는 전후경제계획위원장으로 활약하는 등 정부관계 활동도 활발히 해
스웨덴을 오늘의 복지국가로 만드는데 이론적 실천적으로 현저히 기여했다.

특히 2차대전후에는 오랫동안 국제연합 유럽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장, 라틴아메리카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국제적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인종적 국가적 편견이 없기로는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국제적으로도 정평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그의 성가는 대단하여 비록 그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라
도 일단은 그의 의견을 경청했다는 소리가 정설화되었을 만큼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신망이 높았다.

미르달은 단순히 탁월한 경제학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지적 탐구영역이
넓고 학문적 조예가 깊어 케네스 볼딩,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슘페터와
더불어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 이후 가장 훌륭한 종합사회과학자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일찍이 뒤에 설명할 순환적.누적적 인과관계원리란 스웨덴학파 방법론
을 구사하여 미국 흑인문제를 종합사회과학적으로 분석했다("미국의 모순"
1944).

1968년에 간행한 "아시아의 드라마"에서는 남아시아제국의 경제문제 특히
빈곤과 발전노력에 대해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고찰까지 아우르면서
이론적 실증적으로 분석하여 전세계적 찬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해서도 남이 따를 수 없는 이론을 정립했다
("사회이론과 가치" 1957).

중농주의에서 시작해 신고전학파 후생경제이론에 이르기까지 경제과학이
결코 가치중립적이 아니었음도 실증했다("경제이론형성과 정치적 요소" 1939)

이처럼 종합사회과학적 활동을 했지만 그 역시 젊었을 때는 볼딩 등과
마찬가지로 치밀한 경제이론적 분석에 투철했었다.

정태분석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한 학위논문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생전에
이미 고전으로 자리잡은 "화폐적 균형"(1939)도 빅셀의 중립적 균형이란
구상을 동태화한 것이고 "경제이론과 정치적 요소" 역시 치밀한 과학적
분석으로 일찌감치 고전대열에 낀 저술이었다.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1956)를 놓고 미국이 풍요한 사회냐 여전히
빈곤문제가 남아 있느냐 하는 논쟁이 한창일 때 그는 "풍요에 대한 도전"
(1963)이란 작지만 통찰력 깊은 책을 내 미국사회의 불평등구조가 해소되지
않는 한 부를 체증적으로 가져오는 기술진보는 기술적 실업을 낳고 기술적
실업이 세습화됨으로써 "사회침전층(social underclass)"이 생겨 한편으로는
임금추상 인플레이션,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고율실업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70년대 미국에서 현실화된 소위 스태그플레이션을 예언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공적으로 그는 197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임종철 <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