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구 < 국제부장 bklee@ >

경제가 뒤죽박죽이다.

한때 한국호의 상징처럼 비쳐지던 대우그룹이 힘없이 쓰러져 가고 있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쪽에선 우리경제가 이미 위기를 극복했다고 야단들이다.

떠오르는 한국경제를 대표하면서 세계를 누벼온 대우그룹의 운명은 마치
바람앞의 등불이다.

턱없이 높은 금리를 부담하는 수모를 감수해오더니 이제는 계열회사들을
무더기로 팔아치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

대우그룹의 몰락은 금융시장에도 큰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주가가 급락하고 금리도 가파른 오름세를 타고 있다.

급기야는 정부가 무제한으로 자금을 동원해 투자자들의 환매에 대비해야
하는 사태마저 초래됐다.

그런데도 국민들 사이에선 옛날과 같은 위기의식이 없다.

한국에 다시는 경제위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분위기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경제지표들을 살펴보면 딴은 그럴만도 하다.

1년전만해도 300선 안팎에 머물던 종합주가지수가 900대에서 오르내린다.

공장가동률도 크게 올라가고 있다.

백화점등 소매점에서는 소비증가를 피부로 느낄 정도라고 한다.

2.4분기 성장률이 9%선으로 추정된다는 정부관계자의 이야기도 나온다.

경제위기에 빠졌던 나라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경이적인 내용들
이다.

그러나 한국이 과연 위기를 벗어났을까.

우리경제는 예전보다 무엇이 얼마나 나아졌는가.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외환보유고가 크게 늘었으니 위기요인이
감소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외환보유고 증가란 것은 예전에 달러당 8백~9백원 하던 원화환율이
1천2백~1천3백원선을 오가는 약세를 유지하면서 무역흑자가 불어난 데 대부분
힘입은 것이다.

원화가 약세로 돌아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일 원화가 머지않아 다시 강세로 돌아선다면 어찌될까.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기업은 얼마나 될까.

기업재무구조도 개선됐다고는 하나 증시가 갑자기 활황을 보이는 상황이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됐을까.

유상증자나 회사채 발행이 여의치 않았더라도 빚을 줄이고 유동성을 개선할
수 있었을까.

또 금리가 지금처럼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찌됐을까.

그래도 기업실적이 사상최고의 이익을 올렸을 거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이 "노"라면 위기가 완화된 것은 거의 외생변수에 힘입은
것이라고 판단해도 된다.

한국경제 자체적인 체질개선은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해 금융기관등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킨 조치도
있었지만 이는 국민의 세금을 털어 구멍난 부분을 메워준 것이니 애당초
체질개선이라고 얘기할 것도 없다.

돌이켜 보면 한국기업 한국경제가 수렁에 빠진 것은 기본적으로 인플레
경제체질에 원인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MF이전까지 한국에선 자산은 갖고 있으면 가치가 일방적으로 늘어만 왔다.

따라서 기업들은 부동산을 사들이고 시설투자를 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부동산 값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 주었기 때문에 본업에서는 좀 손실이
나더라도 이를 충분히 상쇄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웬만큼 방만한 경영을 하더라도 용서가 된 셈이다.

따라서 많은 기업들은 체질강화보다는 자산을 사들이는데 더욱 힘을
기울였다.

사들인 땅에는 공장과 설비가 설치됐고 이는 중복투자 과잉생산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이른바 인플레 경영이다.

금융기관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부실채권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인플레 경영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자산가격이 계속 오르다보니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부동산을 사들였다.

그리곤 모두가 부자가 된듯 펑펑 돈을 써댔다.

최근의 대우사태는 자산확장 위주의 노선을 걸어온 한국기업들의 인플레
경영이 낳은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도 벌써 다시 옛날 인플레경제의 악몽이 되살아나려 하고 있다.

주범은 물론 부동산이다.

1백평 규모에 이르는 호화아파트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그린벨트 규제도 완화돼 땅투기마저 재연될 조짐이다.

그렇게 무서운 열기를 내뿜었던 부동산 신화의 망령이 다시 우리를 엄습하려
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기업들도 힘든 체질개선보다는 인플레 경영의 단
열매를 따먹는데 힘을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최근 다시 살아나는 부동산 열기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통화량 증대 주가상승등으로 유동자금이 크게 늘어난 상황이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오마에 겐이치도 지적하고 있듯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은 대단히 취약하다.

체질개선을 못한 채로 다시 인플플레경제가 만연한다면 우리의 앞길에는
더욱 험악한 위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