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모습을 담은 영화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가
아닐까 한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타워즈"와 더불어 3대 공상과학(SF)영화라는
칭호를 얻고 있는 이 영화는 어떤 점에서 사람들에게 그토록 매력을 느끼게
하는 걸까.

서기 2019년의 로스앤젤레스를 무대로 한 "블레이드 러너"는 갈 때까지
가버린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핵전쟁에 의해 파괴된 지구, 태양 빛이 차단돼 언제나 어둡고 비가 내리는
암흑의 도시에서 인간들과 인간들이 만들어낸 존재, 리플리컨트(Replicant
.복제인간)들이 살아간다.

이 영화에서 2019년은 온갖 복제 생물들이 난무하는 시대다.

복제 인간뿐 아니라 여러 동물들도 진짜는 흔하지 않다.

대부분 복제품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상황이다.

현대 사회에서 동물 복제는 과학적 측면에서 아주 흥미있는 주제고 많은
인력과 자원이 그 연구에 동원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후인 이 영화 속의 어두운 사회를 향해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인간은 자신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리플리컨트들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감정이라는 요소는 주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일까.

자연스럽게 리플리컨트들에게도 인간과 비슷한 감정들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한 갈등과 혼란 속에 인간들은 급기야 자신이 복제된 존재임을 모르는 리플
리컨트들을 대량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자신이 복제 인간임을 모르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들은 있지도 않은
개인적 과거를 꾸며 리플리컨트들의 기억 속에 주입시킨다.

이젠 자신이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오는 "기억을 제작해 주입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예컨대 자기만의 어린 날 소중한 추억들이 누군가가 컴퓨터 앞에 앉아 생각
나는 대로 키보드를 두드린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 영화는 이같은 설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이라는 부분에 대해 관객들에게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우주 비행사가 대기권을 뚫고 지구 밖으로 나가 우주선에 난 창문으로
지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고 한다.

손톱만하게 보이는 푸른 별,그가 살아왔던 사회와 그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그 자그마한 점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제 엄지손가락 하나로 슬쩍 눈 앞을 가려 안 보이게 하면 그것으로 지구와
비행사의 정신적 연결은 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지금 밟고 있는 것은 지구의 땅도 아니요, 그나마 보고 있던 눈 앞의
작은 별, 작지만 많은 것을 내포한 푸른 점도 이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얘기가 좀 비약됐지만 자기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물론 우주
비행사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무의식 중에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며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에게도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던진 자기 정체성의 의문에 관한 고찰은
충분히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믿는다.

-----------------------------------------------------------------------

<> 이현수

<>한국과학기술원 영화동아리 은막 회원
<>next98@kaist.ac.kr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7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