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도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냉철하게 사고하는 자세가 필요하죠. 무작정 연구에만
매몰되면 자의든 타의든 방향이 왜곡되기 십상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정서영(44) 박사는 "철학"을 유난히 강조하는
과학자이다.

역사와 문학에도 남달리 관심이 많다.

그에게는 미국 유학시절이 삶의 전환기였다고 한다.

국내에서 대학(서울대 약학과)을 마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5년여간
의 유학시절에 "과학자의 길"이 뭔지를 경험으로 깨달았다고 말한다.

"과학자는 스스로 엘리트라는 의식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엘리트란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자세를 가졌을 때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언제나 "사회"를 생각
합니다. 오늘날 미국의 과학수준은 과학자들의 이런 자세가 만들었다고
봅니다"

정 박사는 국내 의과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다.

인공장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로 평가되는 유타대학에서 인공췌장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2년간의 포스트닥 과정을 마친후 지난 96년 KIST에 들어가 생체과학연구센터
에서 유전자 치료법과 함께 경구용 백신, 국소용 항암제 전달체 등 약물전달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정 박사는 특히 약물 전달체계인 DDS(Drug Delivery System) 분야에 권위를
갖고 있다.

DDS란 약물이 환부에 정확히 도달해 제대로 효과를 낼수 있도록 안전하게
운반해주는 전달체를 말한다.

정 박사가 최근 발표해 의학계에 주목을 끈 "먹는 폐렴백신"은 DDS를
이용한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보통 백신을 주사하거나 알약처럼 먹을 경우 환부에 도달하기 전 효과가
떨어지게 마련인데 정 박사는 백신에 고분자 보호막을 입혀 소화효소나 강한
위산에도 파괴되지 않도록 했다.

또 목표지점을 찾아가 맞추는 크루즈 미사일의 "유도장치" 원리를 도입해
백신을 항원세포에 정확히 도달하게 만들어 효과를 기존의 주사제보다 크게
높였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는 보통 15년이라는 오랜 기간과 3억~6억달러의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그러나 약물전달체계를 이용할 경우 신약 개발에
드는 노력과 비용을 절반 수준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정 박사는 올 4월 미국의 의학및 생물학분야 권위단체인 AIMBE(American
Institute for Medical & Biological Engineering)의 정식 회원으로 선임
됐고 지난 93년부터는 DDS분야 세계적인 학술지인 "저널 오브 컨트롤드
릴리즈"의 편집위원으로 활동중이다.

< 정종태 기자 jtchung@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