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영 < 아주대 환경도시공학부 교수 >

공직자 수난시대인가.

개혁이니 사정이니 하는 칼바람에 공직자들이 복지부동하고 있고, 촉망받던
관료들이 하나씩 민간기업으로 옮기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직에는 항상 높은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 박봉에 시달렸지만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과 자긍심에 차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공직사회에는 냉기류가 흐른다.

과거에는 성장시대의 주역이라는 화려함과 당당함이 있었는데, 요즘은
"환란"의 주범이라는 "왕따"시선이 따가울 뿐이다.

게다가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공직사회 흔들기"나 사정의 칼바람도
매서운 것이었다.

얼마전 중앙공무원의 7~8할에 해당하는 대규모 인사잔치가 있었지만 공직
사회의 분위기는 좀체 바뀌지 않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개혁"이라는 구호에 억눌려 있는 것이다.

"공직자 10계명"을 낭독하는 공무원들의 목소리에는 무기력증마저 보인다.

장관부인들은 옷뇌물을 받고, 장관은 거액의 공연격려금을 받지만, 과장급
공무원들은 선물도 경조사비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동료들이 명퇴로 또는 불명예스럽게 공직을 떠났지만, 남은
사람들은 답답하다.

오늘날 이같은 공직사회의 우울증은 무엇보다 개혁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킨슨의 법칙"이 말하듯 우리의 공공조직은 시간이 지나면서 비대해졌다.

공조직의 개혁 당위성은 충분했다.

지금은 옛날 화려했던 테크노크라트들이 주름잡던 시대가 아니다.

조그만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을 빌리려 해도 예전에는 정부의 시혜가
필요했다.

정부는 곧 전능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졌는데 관은 변하지 않았다.

민간기업은 세계화에 훈련이 되었는데 관은 우물안 개구리였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며 거창하게 출발한 개혁은 공직사회를
요란하게 흔들었을 뿐,부처마다 국장자리 몇개 줄이는 선에 그치고 말았다.

해방 이후 수차례 행정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이번처럼 용두사미식으로 끝난
경우는 드물다.

눈치보고 시간벌기에 연연하던 공직사회는 "제자리잡기"에 서성거리고 있는
형상이다.

누가 그들의 자리를 잡아주나.

갈팡질팡하는 개혁바람에 공직사회는 주눅들고 우울하다.

요즘 국정이 흔들리고 있다.

철학없는 정치논리가 범람하기 때문이다.

공직은 자긍과 명예가 밑천이다.

그들은 개발연대의 첨병이었다.

밤 늦게까지 관청가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을 때, 그처럼 공직사회가 신바람
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발전하였다.

그러나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로 바뀌면서 차차 우리 사회에는 정치가
범람하고 행정까지도 정치논리가 우선하게 되었다.

정권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면 항상 선거와 표를 의식하게 마련이다.

그만큼 정치바람이 거세어진다.

우리의 관료조직은 정치에 약하다.

토지공개념이나 금융실명제는 오랫동안의 공무원들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
실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전 정권의 유산이라는 이유만으로 폐기당했다.

반면 많은 민생법안들이 국회에서 잠자거나 청와대나 당의 선거논리에
밀리고 있다.

위천공단이나 새만금사업, 스크린쿼터제 같은 현안들이 세월없이 정치바람에
표류하고 있다.

장차관들이 중심을 잡아주기보다 정치에 영합하고 뒤치다꺼리는 공무원들의
몫이다.

빅딜을 비판했다 혼쭐이 난 장관은 정치판세를 잘못 읽고 낙마한 예이다.

그래서 정책개발에 앞장서야 할 관리들은 팔짱을 끼고 눈치보기에 바쁘다.

개방식 임용제도를 보는 공직사회의 눈도 불안하다.

전문가 특채니 젊은 피 수혈이니 하는 명분은 훌륭하다.

그러나 전문가를 빙자한 정치바람이 불지 않을까.

공무원들도 전문분야가 있다.

그런데 순환보직을 원칙으로 한 우리 인사제도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보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를 키운다.

너무 인사가 잦다 보니 과장보직 몇 개월, 국장보직 몇 개월만에 빙글빙글
돌다가 승진잔치를 벌인다.

관료 출신 장차관의 이력서를 보라.

해당 부서 안 거친데 없는 팔방미인들이다.

그들은 성공했지만, 공직이 천직인 일반 공무원들은 설 자리가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공무원들은 우울하다.

요즘 들어 더욱 심화되는 지역편중 인사, 누구집에서는 달러가 쏟아지지만
마냥 가벼운 월급봉투, 정치권의 리스트에는 항상 희생양이 되는 선배공직자
들, 갈피 못잡는 국정을 대신 떠받쳐야 하는 행정책무,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공직사회를 우울하게 한다.

무엇보다 공직사회가 안정되어야 한다.

행정은 국가의 리더십이다.

그동안 박봉에 시달리고 가난했지만 긍지가 있었다.

그 긍지가 책임행정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공직사회가 잘 작동하여야 사회전체가 리듬을 찾는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