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의 빈곤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조그만 섬나라.

굳이 OECD에 가입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를 이웃나라들과 비슷한 개발도상국
이라고 자처하는 나라.

이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면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1인당 국민소득으로 보면 엄연한 사실이다.

세계은행에서 발간하는 "세계개발보고서" 최근호를 보면 싱가포르의 97년도
1인당 GNP는 2만9천달러로서 조사된 1백33개국 중 단연 1위로 기록되어 있다.

2위는 미국(2만8천7백달러)이, 3위는 스위스(2만6천3백달러)가 각각 차지하
고 있다.

여기서의 1인당 GNP는 생활수준의 국제비교가 좀더 정확히 될 수 있도록
미국가격을 기준으로 한, 즉 구매력 평가기준에 의해서 측정된 것이다.

76년 세계 20위권에 머물렀던 싱가포르와 홍콩의 생활수준이 97년에는 세계
1위와 4위로 올랐다.

세계 50위권에 있었던 한국의 생활수준도 20위권(1만3천5백달러)으로 향상되
는 등 실로 엄청난 변화가 지난 20년 사이에 아시아 신흥공업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과연 싱가포르와 홍콩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높은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도 향후 20년 후에는 세계 정상의 소득수준에 도전해 볼 수
있을까.

몇년 전 미국 MIT의 폴 크루그만 교수는 동아시아의 경제기적을 혹평하는
그의 논문에서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생산성보다는 주로 자본투입에 의한
것이어서 곧 수확체감의 법칙에 의해서 생산이 둔화되거나 멈출 것"이라
하였으며 동아시아 경제를 "종이 호랑이"라 불렀다.

그는 심지어 싱가포르의 경우 국내저축동원 등에 정부개입이 지나쳤다는
것을 근거로 리콴유가 이끌어 온 싱가포르를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에 비유하
기도 했다.

오비이락처럼 전혀 다른 이유에서 발생한 것이긴 하지만 현재 한국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외환위기의 후유증에 휩싸여 아직도 역경을 헤매고
있다.

과연 아시아의 경제기적은 끝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해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의 외환위기는 한국 태국 말레이시아의 경우 자본자유화와 경제개방을
추진하면서 거시정책을 잘못 운용한데서 비롯됐다.

관치금융 및 제도적 미비와 미숙한 위기관리 등도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역할을 했다.

싱가포르와 홍콩이 그동안 이룩한 고도성장은 모두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적인 첨단기술이나 대규모 생산기업이 없이도 단순히 부지런한 자본축적
과 개방체제하에서의 효율적 자원배분만으로도 오늘의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
이다.

앞으로 기술개발과 인적자본의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상당
기간 성장동력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과 대만 등도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들 경제가 이룩한 업적을
답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들 경제로부터 꼭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무역자유화와 철저하게 국제화된 사회가 우리
에게 가져다줄 혜택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산 교과서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선 상품교역뿐 아니라 건설 금융 투자 등 모든 분야가 완전히 개방
되어 시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국내제도와 관행을 국제적 기준에
따라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이것은 나라의 운과도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탁월한 정치적
리더십과 정직하고 유능한 관료조직의 확충이 필수적이다.

1965년 싱가포르가 건국된 이래 그동안 리콴유가 발휘해 온 정치적 행정적
리더십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는 소국이긴 하지만 다양한 인종과 문화 및 언어를 가진 나라를 공정하고
엄격한 법과 제도의 틀을 통해서 기강있고 일체감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훌륭한 주택, 보건 및 교육 등의 사회복지정책을 통해서 활력있는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은 실로 배울 점이 많다.

또 조그만 도시 국가를 경영하는 관료들에게도 미국에서보다 더 높은 경제적
보상을 주는 동시에 강도 높은 규율을 요구함으로써 부패없는 깨끗한 정부를
만들었다.

덕분에 국민들은 수준 높은 양질의 공공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는 모두 우리가 기필코 배워나가야 할 점들이다.

한국의 현행 교육제도와 정부의 임용제도로는 선진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력
을 양성하는 데, 그리고 고도의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데 미흡한
점이 많다.

오늘도 많은 엘리트 학생들이 비생산적인 고시공부에 매달려 있으며 그로
인해 대학교육이 황폐화되어가고 있다.

잘못된 제도와 관행은 하루빨리 고쳐나가야 하겠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