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들은) 경기가 회복되는 틈을 이용해 양적팽창으로 가는 유혹에
빠져선 안된다. 지금은 기업덩치를 키울때가 아니라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려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김대중 대통령)

"5대그룹이 부채비율을 감축하지 않은채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강봉균 재경부 장관)

"5대그룹이 확실하고 충분하게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채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이헌재 금감위원장)

김대통령과 경제정책 수뇌부의 이런 일련의 발언이 주는 메시지는 뚜렷하다.

딴 생각 하지 말고 구조조정에나 충실하라는 경고다.

강 장관과 이 위원장은 LG의 대한생명 인수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
했지만 이는 LG만이 아닌 5대그룹 전체를 겨냥한 발언이다.

이에따라 적어도 올 연말까진 5대그룹이 대규모 신규사업을 꿈꾸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김대통령이 5대그룹 총수들과 약속한 5대 개혁원칙 가운데 정부는 그동안
부채비율 축소에서 이제 주력기업(핵심역량) 중심의 슬림화쪽으로 액센트를
옮겨 찍은 셈이다.

금감위 관계자는 "과다.과오.과잉투자의 개선없이는 국제 경쟁력 확보가
어려운데 또 사업을 벌여선 대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얻기 어렵다는 의미"
라고 해석했다.

특히 이위원장은 5대그룹이 구조조정 계획(재무구조개선약정)을 이행
하겠다는 약속만으론 새사업을 펼수 없다고 못박았다.

계획만으로 구조조정이 끝난 것처럼 여기지 말고 국민들에게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라는 것이다.

반도체 빅딜에다 LCD 사업에 17억달러 외자를 끌어들이는 등 비교적 열심히
해온 LG를 빚대 "경고메시지"를 던진 것은 다른 그룹들도 알아서 새겨들으란
의미로 해석된다.

예컨대 대우가 힐튼호텔을 판다면서 성과가 나오지 않거나 삼성과 대우가
자동차 빅딜을 매듭짓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우회 경고이기도 하다는게
정부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직격탄을 맞은 LG 관계자는 "솔직히 말해 곤혹스럽다"고 토로했다.

LG를 비롯 재계 전체가 정부의 진의파악에 분주한 상황이다.

현대는 항간에 나돌던 한라중공업 인수설을 부인했다.

현대와 SK의 신용카드 사업진출도 올해엔 물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올초부터 재경부에서 틀어쥔채 시간을 끌어왔고 인허가권이 금감위로 넘어
왔지만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대와 삼성이 각축을 벌여온 한국중공업 민영화 등 올하반기 공기업
매각일정도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정부의 "선 구조조정"론을 대입해 보면 한중과 같은 알짜배기 회사를 구조
조정 안한 재벌에게 넘기기 어렵다는 얘기와 통한다.

은행의 주인을 찾아주기 위한 은행법 개정작업은 다시 내년으로 넘겨질
공산이다.

정부 당국자는 "작년에 보류된 은행법 개정을 하반기께 재추진할 것을
검토했지만 구조조정이 완료되기 전까진 논의자체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이헌재 금감위원장의 발언중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형
투신사나 뮤추얼펀드에 대해 1년 열두달 철저히 감시하겠다는 것.

그는 펀드 감시가 재벌 길들이기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재벌계열 증권사들의 거대 펀드가 어떤 형태로든 내부거래에 이용
되는 것을 철저히 막겠다는 의지는 단호하다.

정부가 5대그룹을 더 옥죄기에 나선 것은 해외에서 국내 기업구조조정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인 시각이 많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캉드시 IMF 총재 등 국제금융계 주요인사들이나 해외 언론은 5대그룹의
구조개혁 노력에 대해 발표는 거창한데 실제 실행은 미진하거나 시늉만
낸다고 보고 있다.

가용 외환보유고가 6백억달러에 육박하고 국내 금융.증권시장이 안정돼도
기업개혁 부진하면 우리경제에 대한 전체 평점이 높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초만해도 부실기업.금융기관을 정리하는데 5대그룹을 인수자로
염두에 뒀던 정부가 방향을 급선회한 것에 대해선 비판의 소리가 적지 않다.

재계 관계자는 "LG가 대한생명의 1차입찰에 참여했을 때만 해도 아무말이
없다가 재입찰을 앞두고 제동을 건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 오형규 기자 oh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