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가 서슬퍼렇던 70년대 중반 한 선배 언론인이 "삿갓 쓴 민주주의"
라는 글을 썼다가 고초를 겪은 적이 있다.

당시 정권이 유신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로 내세운 것을 비아냥댄 글이었
다.

"민주주의에 국적이 따로 있느냐. 삿갓 쓴 민주주의는 사이비 민주주의일
뿐이다"라는게 그 요지였다.

새삼 20여년전의 필화사건을 떠올리는 것은 요즘 DJ노믹스가 "삿갓 쓴 시장
경제"처럼 되는 것 같아서다.

DJ노믹스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기본철학으로 삼고 출발
했다.

그리고 그 노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민들에게 홍보되고 있다.

새로 구성된 경제팀도 출범과 함께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은 25일 중견기업연합회 초청 연설에서 "구조개혁을
통해 시장경제를 완성시키는 것이 2기 경제팀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60년대 이래 경제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형성된 정부주도의 경제체제를
90년대의 시장경제체제에 맞게 뜯어 고쳐야 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지극히 옳은 얘기다.

현상에 대한 인식도 정당하고 방향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제팀 행적에 비추어보면 석연치가 않다.

과연 현 정부의 경제팀은 시장경제 원칙에 충실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비단 대한항공의 경영권문제나 삼성그룹 회장의 사재출연문제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벤처기업 지원만해도 시장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

벤처기업 육성에서 정부의 역할은 여건을 조성하는 선에 그쳐야 한다.

벤처의 고향인 미국이 그랬다.

그러나 정부는 올해만도 3조8천억원의 벤처육성자금을 풀고 있는 중이다.

모두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 돈이다.

이같은 직접적인 자금지원은 또다른 모럴 해저드와 대규모 부실채권만을
양산할 우려가 있다.

벤처기업의 성공확률이 7%라고 하니 어림잡아 93%는 부실화되는 셈이다.

외환위기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재정의 역할이 강조되다보니 시장 곳곳에서
정부의 입김도 세지고 있다.

시중은행의 정부지분 매각설에 주가가 춤추는게 대표적 사례다.

이처럼 정부의 영향력이 자꾸 비대해지면 DJ노믹스의 시장경제는 결국
''삿갓'' 쓴 시장경제''밖에 안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글로벌 스탠더드"로부터의 탈락이 될 것이다.

< 임혁 경제부 기자 limhyuck@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