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전의 일이다.

필자는 친구로부터 색다른 내용의 편지 한통을 받았다.

반가워서 뜯어보니 신혼살림 물품 리스트가 들어 있는 청첩장이었다.

사연인즉 맏이가 결혼을 하게 됐는데, 양가가 합의하여 결혼 축의금을 사절
하기로 했다.

그 대신 새 살림을 마련하기 위해 각자가 조금씩 출연하라는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니 재미가 있었다.

품목은 수저 냄비 밥그릇 밥상 의자 등 조그만 것부터 큰 것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물품 금액은 1만원짜리 미만도 있었으며, 최고 1인당 3만원이 넘지
않도록 못박았다.

그래서 12만원짜리 식탁을 사주기 위해서는 4명이 공동출연하여야 했다.

총 물품구입비는 6백만원 정도에 불과했지만,새 신랑과 신부가 밥 해먹고
이불 덮고 자면서 생활하는 데는 전혀 모자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품목선택 및 출연방법.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가재도구 품목을 클릭하여 선택하고, 송금은
온라인으로 하라는 것이다.

요즘은 결혼시즌이다.

내 또래의 경우 1주일에 3~4건의 청첩장을 받게 된다.

IMF 경제난으로 작년에 미뤘던 결혼식이 올해는 다소 여건이 나아지면서
몰리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결혼문화는 허례허식을 벗고 친지들로부터 진심으로
축하를 받은 친구의 경험과 같이 조금씩 발전하여야 할 때라고 본다.

나중에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니 모두 3백여명이 물품대금을 보내왔고, 그 중
2백여만원이 남아 이웃 양로원에 보냈다고 한다.

친지로부터 서운하다는 소리 안 들으면서 큰 부담을 주지 않아 좋고,
아이들에게 검소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서 좋았다며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해외 상사주재원 시절 외국사람이 하던 것을 흉내냈을 뿐인데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고 한다.

이같이 서구문화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해내는 것이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적 글로벌 스탠더드를 조화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 이종구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 cklee@kitech.re.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