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삼동에 있는 최재천(36) 변호사 사무실에 들어서면 법률서적보다
의학관련 서적이 더 많이 보인다.

줄잡아 3백~4백권은 됨직하다.

의사인지, 변호사인지 언뜻 혼란을 일으킬 정도다.

"돌팔이 의사들의 킬러"

법조계에서 "반의사"으로 통하는 최 변호사를 이르는 말이다.

지금껏 수임한 의료분쟁 소송중에서 승소를 이끌어낸 것만 3백여건.

특히 최 변호사가 맡은 소송은 승소율이 95%를 넘나든다.

돌팔이 의사들이 단연 두려워하는 변호사일 수 밖에 없다.

지금껏 결백을 주장하는 3백여명의 의사들을 굴복시켰다.

전문적인 의료지식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최 변호사가 의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지난 89년.

군법무관 시절이다.

"남들이 안하면서도 보람된 일이고 변호사로서 성공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가를 생각했지요"

심사숙고끝에 결정한 것이 의료분쟁 변호였다.

특히 의료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드물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이때부터 친하던 군의관들로부터 틈나는 대로 의료지식을 전수받았다.

93년 변호사 사무실 개업 후에는 1년 가량 의료분쟁 관련 판례와 학위논문
등을 설렵하며 본격적으로 의학공부를 했다.

지금은 전문적인 의학용어로도 의사들과 자연스럽게 토론을 벌이는 의료
전문가가 됐다.

최 변호사는 94년 4월 의료분쟁 변호사로 나선지 한달만에 첫 사건 의뢰를
받는다.

의뢰인은 춘천에 사는 모 선배.

아내가 아이를 낳다 잘못돼 본인은 식물인간이, 아이는 뇌성마비가 된
사건이었다.

그 부인은 몸무게가 4.5kg에 달하는 거대아를 낳았다.

하지만 의사는 정상아로 판단, 제왕절개를 하지 않고 정상분만을 고집하다
사고가 일어난 것.

그런데도 담당 의사는 자신의 실수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아 화난 선배가
그에게 하소연을 해온 것이다.

사건 수임을 맡은 최 변호사는 먼저 당시의 진료기록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의사의 실수를 잡아낼만한 단서는 없었다.

의사들이 미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진료기록을 고쳐 놓았던 것이다.

수개월동안 진전이 없던 최 변호사는 어느날 의료보험관리공단을 떠올렸다.

보험금을 청구하기 위해 제출한 서류의 기록이 법원에 제출한 것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친 것.

마침내 의료보험관리공단에 제출한 서류에 쓰여 있는 "옥시토신"이라는
단어에서 의사의 실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분만촉진제인 옥시토신을 여러차례 투여했다는 것은 거대아여서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의사가 자연분만을 고집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 소송이 승소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의료분쟁을 전문으로 하다보니 최 변호사가 맡은 의료소송중 최초의 판례가
된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판례가 전국적으로 의사들의 항의를 불러 왔던 일명 "감기약"
사건이다.

특정 감기약을 복용한 환자가 수차례 부작용을 호소했는데도 의사가 투약을
계속해 끝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최 변호사는 약물 투여후 부작용이 발생하였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똑같은
약을 투약했다는 의사의 과실을 주장하여 승소했다.

이전에는 의사에게는 잘못을 묻지 않았던 사건유형이었다.

이 판결후 광주시 의사회를 비롯 대구시 의사회 소속 의사 7천여명이
반대서명을 벌일 정도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최 변호사를 싫어하는 것은 이제 돌팔이 의사뿐이 아니다.

"의사킬러"라는 명성이 퍼지면서 이제는 일반 의사들도 상당수가 그를
싫어한다.

얼마전에는 모 의사관련 회보지에 연재기고를 하기로 했으나 1회만 내보낸
채 의사들의 반대로 중도하차하기도 했다.

지금도 의사들로부터 협박전화를 종종 받고 있을 정도다.

"아직도 의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태에 있는 환자들의 권리를
대변해 주는 것이 변호사로서 행해야 할 덕목이 아닐까요"

그는 무엇보다 환자의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
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의료사고가 나면 미국의 경우 의사가 무과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한국은 의료에 문외한인 환자가 의사의 과실을 증명하도록 되어 있을 정도로
제도가 모순투성이다.

의사나 병원보다 상대적 약자인 피해자(환자)측 변호만을 주로 맡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의사들이 싫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인으로 지내는 의사들도 많다.

모두 그의 고충을 이해하고 의료의 발전을 바라는 뜻있는 의사들이다.

"의료분쟁 변호는 단순하게 의사에게 책임을 지우면 끝나는 업무가
아닙니다. 의사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의료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촉매제
가 되고 있으니까요"

< 류성 기자 st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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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