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사진작가이기도 한 오효진 정부공보실장을 팔방미인
이라고 한다.

교사에서 방송기자로, 프리랜서로, 다시 신문기자로, 정치인으로,
공무원으로 그 화려한 변신도 이래서 가능했다.

오효진 공보실장은 지난 14일부터 대학로 한국문예진흥원에서 사진전을 열고
있다.

대학과 기자시절 취미삼아 찍어온 사진들이다.

평소 틈틈이 모아둔 사진이 어느덧 방을 가득 메우고도 넘쳐 여러 사람들
에게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게 그의 변이다.

오 실장은 지난 70년 서울대 국문과 3학년때 "잉어와 곱추"라는 단편소설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소위 "학생문인"으로 일찍부터 유명세를 탔다.

졸업후 고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31살의 뒤늦은 나이에 MBC기자가
됐다.

사회부 기자이던 80년 5월 취재반장으로 정동영(현 국민회의 대변인)기자
등과 함께 암울했던 광주 민주화운동 현장에 내려갔다.

그는 "시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를 위해 싸우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언론자유선언 활동의 주동자로 지목돼 서대문감옥에
투옥되며 직장도 잃었다.

"15센티의 태양" "고운 꽃은 시들지 않으리" 등 그의 시집은 여기서 나왔다.

종이와 펜이 없어서 책 뒷표지 속장에 뽀쪽한 도구로 시구를 꼭꼭 눌러 쓰곤
했다.

출소후 한동안 고독과 씨름하며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글이 평가받아 82년
월간조선에 스카우트됐다.

84년부터는 "오효진의 인물탐험"이라는 인터뷰 기사로 필명을 날렸다.

대통령, 거물급 정치인, 대기업 회장 등 50여명을 탐험했다.

"나는 인터뷰를 통해 감동을 찾아낼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인터뷰하다가
나 자신이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인생은 바로 소설과 다름없다는게 내
철학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 김우중 대우회장으로부터는 르망 승용차, 김종필(JP)
총리로부터는 골프채,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으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촌지를 제의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JP와의 인터뷰가 인연이 돼 96년 JP사람으로 고향인 충북 청원에서 15대
총선에 출마했다.

한나라당 신경식 사무총장과 겨뤄 재검표끝에 3백73표 차로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데뷔했다.

정치를 왜 시작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에게 자민련측이 출마를 권유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김 주필이 "그럼 빨리 출마해. 당신같은 사람이 정치판에
하나라도 더 있어야지"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다"고.

오 실장은 여러 변신 속에서도 "글쟁이"로서의 자신의 "끼"는 버리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 김옥균에 관한 대하소설을 쓸 작정이다.

< 한은구 기자 tohan@ >

< 오효진씨 약력 >

<>1943년 충북청원 출생
<>대전중.고 졸업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MBC기자
<>월간조선 부장
<>SBS 보도국장
<>정부 공보실장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