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46) '수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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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촉진위원회 선봉에 서다 ]
수출산업촉진위원회가 꼭 필요한 조직이라는데는 정부나 기업들 모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만드는 일은 경제인협회 사무국장인 내가 해야 했다.
상의할 상대도 없었다.
나는 우선 당시의 수출품목을 살폈다.
1백만달러 이상 수출품목은 중석 해태 철광석 면직물 등 네가지 뿐이었다.
수출총액(60년 기준)은 3천2백90만 달러로 GNP(국민총생산)의 1~2%에 불과
했다.
이는 당시 요르단 리비아 라오스 등의 수준에 불과했다.
수출 확대와 관련한 아이디어도 모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61년6월경, 당시 5.16 군사정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은행은 5개년계획안
작성에 착수했다.
기획위원으로 참석한 인사들 간에 수출목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박희범교수(서울대)와 이동욱 논설위원(동아일보)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이 씨는 수출목표를 5억달러 이상으로 잡자고 했다.
박교수 등은 허황된 목표라고 반박했다.
이 씨는 기자출신으로 당시 이미 보세가공으로 수출을 크게 늘리고 있던
천우사 전택보사장 등의 의견을 듣고 있던지라 이렇게 목표를 크게 잡아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계획 작성에 참가했던 실무자들은 연일 수출목표를 늘려잡기 위해
부심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실무자들은 당시 연 50만달러 어치 정도를 수출하던 돼지털을 10배로 대폭
늘려 5백만달러로 책정했다.
당시 돼지털은 미국에 수출돼 페인트용 브러시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동욱씨는 나중에 "돈모 5백만달러어치를 수출하려면 남한 전체가 돼지우
리로 뒤덥혀야 할 것이라고 통박했다"고 나중에 필자에게 웃으며 털어놨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촉진위원회를 구성하기란 쉽잖은 일이었다.
당시 발족취지문은 내가 직접 썼다.
한구절 마다 당시 나의 생각, 포부, 의지가 담겨 있다.
"원시산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이 나라 수풀산업체질에 대한 하나의
갱신제를 마련코저...(중략). 근간 선진국에서 급등하는 노임으로 인해 사양
운명에 있는 산업들을 재빨리 이룩할 것을(...) 주장하면서 세계흐름에 관한
착상과 기술등 두뇌자원을 응결승화시킬 방법을 제시한다"
원시산업은 "돼지털 수출 정책"에서 보듯 당시 우리의 현실이었다.
선진국에서 사양화되고 있는 산업을 인건비가 싼 우리가 받아들여 수출
산업화하자는 제안도 담겨있다.
특히 "두뇌자원"을 운운한 구절은 감회가 새롭다.
오늘날에 IMF위기탈출의 길로 다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취지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본 위원회의 지표는 원대할지언정 실천은 어디까지나 오손도손하게 차근히
열매를 맺어 이 사회에서 기술인, 기업인들에 대한 신뢰를 북돋는데 일조가
되고자 합니다"
5.16 정부가 업적과시를 위한 언론매체 조작에 어지간히 식상한 심정을 나는
"오손도손 차근히"로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신뢰"는 선전이나 조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실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국가대계가 될 수출에 대한 구조를 잡기 위해 나는 발족취지문에 많은
신경을 썼다.
고전을 인용해가며 앞으로 우리 산업정책에 근간이 될 수출구상의 뿌리를
내리고자 노력했다.
맹자에 나오는 승리의 3대요건인 시리 지리 인화도 인용하고 토인비의 역사
의식도 가미했다.
"이나라 수출산업촉진을 위한 시리와 지리는 갖추었기에 예지와 협동을
가미하여 결실을 기할 따름이라고 확신...(중략). 인류사는 항상 개개인의
구상에 한 사회가 호응했을 때 아름다운 꽃이 피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회가 흔들릴 때마다 소수의 창조집단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역사인식
을 갖고 나는 경제인협회를 꾸려갔다.
경제인협회가 그 소수의 창조집단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선상에서
수출산업촉진위원회 발족도 추진한 것이다.
이 취지를 구현하기 위해 위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당시의 수출품은 수출산업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영세한 것을 주어 모으는
식의 수출이었다.
우선 이들 잡다하고 소량인 수출품목들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해서 선진기술을
가미해야 한다.
말하자면 현대식 수출산업으로 육성.발전시켜야 했다.
이를위해 위원회 해야할 중요업무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생각해봤다.
1) 제품수출을 위한 산업개발 및 이를 위한 조사와 계획수립 2) 기술지도
및 훈련방안 추진 3) 교포기업인 유치 및 안내소 설치 4) 기술시험소, 수출
산품 전시장 설치운영 5수출산업육성을 위한 시책건의 및 부대사업 등이었다.
발족취지문과 중요업무를 정한 다음에는 위원회 구성이 남았다.
정부당국과의 협동추진이 필수라고 생각해서 내각수반을 고문으로 하고
관계장관 은행장들까지 망라한 당시로서는 지극히 이색적인 기구를 만들기로
했다.
내각수반을 고문으로 한 민간기구는 당시엔 없었다.
마음씨 부드러운 김현철내각수반은 고문직을 기꺼이 수락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9일자 ).
수출산업촉진위원회가 꼭 필요한 조직이라는데는 정부나 기업들 모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만드는 일은 경제인협회 사무국장인 내가 해야 했다.
상의할 상대도 없었다.
나는 우선 당시의 수출품목을 살폈다.
1백만달러 이상 수출품목은 중석 해태 철광석 면직물 등 네가지 뿐이었다.
수출총액(60년 기준)은 3천2백90만 달러로 GNP(국민총생산)의 1~2%에 불과
했다.
이는 당시 요르단 리비아 라오스 등의 수준에 불과했다.
수출 확대와 관련한 아이디어도 모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61년6월경, 당시 5.16 군사정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은행은 5개년계획안
작성에 착수했다.
기획위원으로 참석한 인사들 간에 수출목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박희범교수(서울대)와 이동욱 논설위원(동아일보)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이 씨는 수출목표를 5억달러 이상으로 잡자고 했다.
박교수 등은 허황된 목표라고 반박했다.
이 씨는 기자출신으로 당시 이미 보세가공으로 수출을 크게 늘리고 있던
천우사 전택보사장 등의 의견을 듣고 있던지라 이렇게 목표를 크게 잡아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계획 작성에 참가했던 실무자들은 연일 수출목표를 늘려잡기 위해
부심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실무자들은 당시 연 50만달러 어치 정도를 수출하던 돼지털을 10배로 대폭
늘려 5백만달러로 책정했다.
당시 돼지털은 미국에 수출돼 페인트용 브러시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동욱씨는 나중에 "돈모 5백만달러어치를 수출하려면 남한 전체가 돼지우
리로 뒤덥혀야 할 것이라고 통박했다"고 나중에 필자에게 웃으며 털어놨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촉진위원회를 구성하기란 쉽잖은 일이었다.
당시 발족취지문은 내가 직접 썼다.
한구절 마다 당시 나의 생각, 포부, 의지가 담겨 있다.
"원시산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이 나라 수풀산업체질에 대한 하나의
갱신제를 마련코저...(중략). 근간 선진국에서 급등하는 노임으로 인해 사양
운명에 있는 산업들을 재빨리 이룩할 것을(...) 주장하면서 세계흐름에 관한
착상과 기술등 두뇌자원을 응결승화시킬 방법을 제시한다"
원시산업은 "돼지털 수출 정책"에서 보듯 당시 우리의 현실이었다.
선진국에서 사양화되고 있는 산업을 인건비가 싼 우리가 받아들여 수출
산업화하자는 제안도 담겨있다.
특히 "두뇌자원"을 운운한 구절은 감회가 새롭다.
오늘날에 IMF위기탈출의 길로 다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취지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본 위원회의 지표는 원대할지언정 실천은 어디까지나 오손도손하게 차근히
열매를 맺어 이 사회에서 기술인, 기업인들에 대한 신뢰를 북돋는데 일조가
되고자 합니다"
5.16 정부가 업적과시를 위한 언론매체 조작에 어지간히 식상한 심정을 나는
"오손도손 차근히"로 표현했던 기억이 난다.
"신뢰"는 선전이나 조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실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국가대계가 될 수출에 대한 구조를 잡기 위해 나는 발족취지문에 많은
신경을 썼다.
고전을 인용해가며 앞으로 우리 산업정책에 근간이 될 수출구상의 뿌리를
내리고자 노력했다.
맹자에 나오는 승리의 3대요건인 시리 지리 인화도 인용하고 토인비의 역사
의식도 가미했다.
"이나라 수출산업촉진을 위한 시리와 지리는 갖추었기에 예지와 협동을
가미하여 결실을 기할 따름이라고 확신...(중략). 인류사는 항상 개개인의
구상에 한 사회가 호응했을 때 아름다운 꽃이 피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회가 흔들릴 때마다 소수의 창조집단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역사인식
을 갖고 나는 경제인협회를 꾸려갔다.
경제인협회가 그 소수의 창조집단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선상에서
수출산업촉진위원회 발족도 추진한 것이다.
이 취지를 구현하기 위해 위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당시의 수출품은 수출산업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영세한 것을 주어 모으는
식의 수출이었다.
우선 이들 잡다하고 소량인 수출품목들을 체계화하고 조직화해서 선진기술을
가미해야 한다.
말하자면 현대식 수출산업으로 육성.발전시켜야 했다.
이를위해 위원회 해야할 중요업무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생각해봤다.
1) 제품수출을 위한 산업개발 및 이를 위한 조사와 계획수립 2) 기술지도
및 훈련방안 추진 3) 교포기업인 유치 및 안내소 설치 4) 기술시험소, 수출
산품 전시장 설치운영 5수출산업육성을 위한 시책건의 및 부대사업 등이었다.
발족취지문과 중요업무를 정한 다음에는 위원회 구성이 남았다.
정부당국과의 협동추진이 필수라고 생각해서 내각수반을 고문으로 하고
관계장관 은행장들까지 망라한 당시로서는 지극히 이색적인 기구를 만들기로
했다.
내각수반을 고문으로 한 민간기구는 당시엔 없었다.
마음씨 부드러운 김현철내각수반은 고문직을 기꺼이 수락했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