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순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jisoon@snu.ac.kr >

"그날 벌어 그날 써야 되는 사람들을 예외로 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평생에 걸쳐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하는 소득의 크기를 감안해 현재의 소비와
저축을 결정한다. 따라서 부유층의 저축률이 빈곤층의 저축률보다 높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 프리드먼의 "소비함수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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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소비가 그 사람의 장기적인 평균소득의 크기에 의해 정해진다는
프리드먼의 주장을 항상소득가설이라 한다.

이는 그 때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현재의 소비는 현재의 소득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케인즈의 절대소득가설을 정면으로 부정한 학설이다.

현재의 소득만이 중요하다는 케인즈 주장은 경기의 호황 불황에 따라
소비가 호황기에는 크게 늘어나고 불황기에는 크게 줄어드는 양상을 보이며
부자들의 저축률이 가난한 사람들의 그것보다 휠씬 더 높을 것이란 결론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경기가 불황에 빠졌을 때 이를 치유하는 좋은 방법은
소득세를 한시적으로 감면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며, 저축률을 높여 경제성장
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라면 저축률이 높은 부자들을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잘살게끔 만드는 정책을 펴야 된다는 처방을 낳게 된다.

이에 대해 프리드먼은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근본적으로는 모두 같은
사람들이란 관찰에 근거해,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들이 평생에 걸쳐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하는 평균소득(항상소득)을 감안해서 그중 일정한 비율을
소비하고 나머지는 저축할 것이므로, 두 부류의 저축률도 동일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저축률을 높이려고 가난한 사람들을 희생해 부자를 더 잘살게
만드는 정책을 펴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또 현재의 소비수준을 결정함에 있어 미래에 예상되는 경제환경의 변화를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소비지출을 늘리기 위해 소득세를 한시적으로
감면하는 정책은 머지 않아 소득세를 다시 인상할 것임을 의미하므로 소득세
를 영구히 감면하는 정책에 비해 그 효과가 아주 작을 것이라는 결론도
내린다.

프리드먼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한참 기세를 올리던 케인즈 경제학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절대소득가설이 틀린 것임을 입증해 케인즈의 이론체계가 매우
취약한 기반 위에 선 것임을 보여줬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현재의 경제상황은 물론 예상되는 장래의 상황변화
까지를 감안해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인생의
이치를 경제이론에 반영시켰다.

이로써 경제의 이론과 응용 그리고 정책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여는데 공헌했다.

일생의 걸친 자신의 평균소득이 얼마나 될까 계산하는데 그가 기대하는
장래의 경제적 처지와 현재의 경제적 처지를 감안해 너무 낙관적인 기대를
가졌던 것으로 판명되면 이를 하향조정하고 너무 비관적인 기대를 가졌던
것으로 판명되면 이를 상향조정할 것이라는 프리드먼의 주장은 그후 합리적
기대이론으로 발전되어 경제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프리드먼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자유주의 시장경제론 및 화폐이론과
일맥상통한 것으로서, 사람들은 단기적으로는 주어진 경제환경하에서 최선의
길을 선택하려고 노력하며 장기적으로는 주어진 경제환경조차도 그들이
원하는 바를 더 잘 달성하게 해 주는 방향으로 바꾸어 나간다는 경제학의
기본명제를 경제의 여러 현상에 걸쳐 일관성 있게 적용한 당연한 귀결이다.

그가 일생에 걸쳐 주장한 것은, 자발적이며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개개인의
의사결정 결과가 시장을 통해 자율적으로 원만히 조정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경제활동이 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조화를 이룰 것이므로
정부라는 강제적 수단을 이용해 시장이 이루어 놓은 경제상태를 인위적으로
고쳐놓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프리드먼에 의하면 입만 열면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거의 틀림없이
남들의 이익을 빙자하여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러한
사람들이 정부를 좌우하게 되면 평상인의 경제적 복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고 한다.

오늘의 우리를 겸허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