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생물이다.

따라서 생기고 쓰이고 때묻고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말은 인간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 캐고 갈고 닦고 가꿔 나간다.

그러나 사람 팔자 알수 없듯이 말의 팔자 또한 알수 없어 말은 "말도 안되는
말"로 잘못 쓰이기도 한다.

얼마전 어떤 수의사 한 분이 텔레비전에 나와 아직 젖도 안떨어진 강아지의
주둥이를 벌려보고 나서 하는 말이 "치아가 자란 뒤에 수술을 하면 되겠다"는
것이었다.

치아는 이를 점잖게 이르는 말이고 보면 어른 아이 없이 두루 보는 텔레비전
에서 참으로 점잔을 있는 대로 뺀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예사로 보지 않은 이에게는 이 치자가 나이의 높임말인
연치에 쓰이는 글자이며 자기 나이의 낮춤말인 마치에 쓰이는 글자임을 떠올
리면서, 강아지의 이를 치아 운운한 언어도단의 점잖음에 여간 민망하지가
않았을 자리였다.

지금 쓰이는 말 가운데 본말이 전도된 채 쓰여도 그저 귓등으로 듣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말이 흔하다 보니 그 수의사도 무심코 그런
실언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가리가 동물의 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란 것은 구태여 국어사전을 열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짐짓 점잖지 않은 말을 쓰기로 마음먹고 머리가 둔하고 어리석은
이를 일러 메주대가리라고 하다가 돌대가리로 통일한지도 꽤나 오래됐다.

생각이 깊지 않은 이를 새대가리라고 하거나 기억력이 좋지 않은 이를
닭대가리라고 부르는 것도 햇수를 헤아리면 아마 돌대가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점잖은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동물을 두고도 쇠대가리니 개대가리니
하고 대가리란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래서 소(쇠)머리국밥으로 통하고 돼지머리고기로 통하고 심지어는 유고의
코소보 지역에서 이른바 인종청소기로 쓰이는 총까지도 그 총대의 밑동을 꼭
개머리판이라고 일러야만 말이 통하는 것이다.

일찍이 국회의 5공 청문회장에서도 당시 야당의 한 중진의원이 전직 대통령
을 두고 돌대가리 운운한 적도 있는터에 이제와서 새삼스레 사람이 격하되고
동물이 격상된 언어현실을 걱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도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느니,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먹는다
느니 하고 사람을 동물에 빗대어서 비아냥거린 말이 있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동물을 의인화하여 쥐를 서생원으로, 토끼를 토생원으로,
자라를 별주부로 격상시키기도 하고 사람이 무서우면 호랑이로, 힘이 세면
황소로, 미련하면 곰으로, 욕심이 많으면 돼지로, 교활하면 여우로, 행실이
말이 아니면 개로 격하시키고 또 그러면 그런가보다 하고 귓등으로 들어넘기
지 않았던가.

하물며 쥐의 세포를 추출하여 사람의 뇌에 이식하고 쥐의 생식기관에 넣어
성숙시킨 정자를 다시 사람의 몸으로 옮겨와 임신을 하는 시대에 이르러서야
서생원 정도의 의인화는 뭐 격상이랄 것도 없는 판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그러고보면 말이 말도 안되는 말로 격하되고 추락하는 판은 바로 우리의
선거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최근의 국회의원 보궐선거 꼴을 보면 문맹자를 위해 선거벽보에 지금의
아라비아숫자 기호 대신 막대기를 그려넣고 유세장 단상에서는 손가락을
펴보이며 "기호 몇번 아무개"가 아닌 "작대기 몇개 아무개"를 외치고 단하
에서는 유권자에게 식권을 뿌리면서 "먹고보자 아무개 찍고보자 아무개"하고
먹자판 구호를 전파시켰던 문맹시대의 선거판에서 그다지 발전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후보자를 봉으로 보고 선거판을 잔치판으로 여기는 유권자 의식도 여전한
모양이다.

동별로 조직된 향우회도 좋고, 통별로 조직된 산악회도 좋고, 반별로 조직된
계모임도 좋지만 그들에게 "삐딱한 사람"으로 보였던 사람들이 수십년만에
이룩한 민주화운동은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고 했던 보릿고개 시대의
선거판을 재현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문민정부가 외친 역사 바로세우기나 국민의 정부가 제2의 건국추진위를
통해 기본을 바로 세우자고 외치는 것도 말을 말이 되도록 올바르게 하자는
말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말은 생물이다.

말이야말로 늘 환경보호가 필요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