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이든 미국기자가 "driving cows home"이 무슨 뜻인 지 아느냐고
물어왔다.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북한행 소떼가 한창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의
일이었다.

"무슨 특별한 뜻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낮에 소떼를 끌고 들판에 나가
열심히 풀을 먹인 후 다시 소떼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 느낌이 어떻겠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그는 "뿌듯함과 기쁨, 그리고 집으로 향한다는 귀향의 포근함과 기대 등
여러가지 복합적 정서들이 농축된 목가적 숙어쯤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정 명예회장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정 명예회장과 그의 소떼가
지니고 있는 은유적 수사는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인 기억이
있다.

적수공권으로 많은 것을 얻은 정 명예회장이 소떼와 함께 고향을 찾으며
느낀 감정이 미국식 금의환향(driving-cows-home)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잘 느끼지 못할 한가지가 더 있었다면 그것은 고향에서
느끼는 참담한 심정 그것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귀향의 행복감보다 이같은 고뇌의 크기가 더 압도적이었을 수도
있다.

어찌됐건 소떼 이후 식량은 물론 염소떼, 비료, 약품, 의류, 미국이
제공하는 씨감자, 그리고 관광객에 이르기까지 북한으로 반입되는 유형물들은
그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양도 많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정 명예회장의 소떼가 뚫어 놓은 돌파구의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북한인들로 하여금 지구촌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북한인들에게 자본주의적 사고와 틀, 용어, 그리고 인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한 오래도록 "지구촌의 이방인"들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우선 경제적 의사소통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활짝 개방한 지 오래된 러시아인들이 아직까지도 통화량이나 금리 등
아주 기초적인 경제개념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고 보면
북한이야 오죽하겠느냐는 유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UN개발기구(UNDP)가 추진하고 있는 북한관료들에 대한
경제교육 프로그램은 더할 수 없이 큰 의미를 지닌다.

UNDP는 세계은행의 주선으로 스위스 네델란드 등 유럽제국의 도움을 받아
40만달러를 확보하고 북한 중앙은행 재무부 등 고위관료 30명에 대해
경제교육을 실시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교육장소를 당초 거론되던 중국 상하이에서 평양으로 바꿔 7주간 거시경제와
미시경제 등의 이론교육을 실시한 이후 이중 8-9명을 선발, 오스트레일리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현장시찰도 실시할 예정이었다.

어찌보면 너무나 하찮은 일 같지만 이 사업처럼 중요한 의미와 핵심을
찌르는 사업도 드물다.

주변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말하는 대로 한줄기 따뜻한 햇볕이 북한의
두꺼운 얼음층을 녹일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도 있는 사업"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30명의 북한인 "경제 전도사"가 북한경제정책의 핵이 되어 조용하지만
견고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도우려는 유럽인들의 순수한 열정이 암초에 부딪혀 있다는
소식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경제교육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던 북한이 이를 확정짓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던 말레이시아인 컨설턴트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교육은 4월초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북한의 태도변화로 인해 당초 계획대로의 진행은 불가능
해졌고 사실상 무기 연기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UNDP 관계자의 판단이다.

금창리 지하시설에 대한 미.북간의 합의사항 이행여부, 평양에서 진행된
미사일협상, 그리고 금명간 전모가 드러나게 될 이른바 페리보고서의 내용을
검토한 후 결정하겠다는 뜻인지도 모른다는 게 UNDP 관계자의 추측이기도
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가 유형적 돌파구였다면 경제교육 프로그램은 무형적
돌파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이를 잘 살릴 수 있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북한에 달려있지만 한국과
미국정부, 특히 미국의회와 페리팀의 신중한 태도 또한 결정적인 변수이기는
마찬가지다.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