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강 최한기(1803~1877)는 말기실학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는 다음 시대를 내다보는 진보적정신의 소유자였다.

혜강은 평생을 당시로서는 한없이 외로운 주장을 글속에 담아 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론을 비난하면서 호혜평등의 원칙아래 나라의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화에 대비하지 않으면 늦는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변통론이다.

또 공론을 모아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공론에 의해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공치론도 폈다.

사농공상의 평등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윤리교육보다는 천문 지리 물리 수학 의학 등 과학기술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통 성리학자에게서는 보기 힘든 이런 선구적 생각은 궁극적 존재를 신기로
규정하고 그것과의 조화속에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기철학의 논리체계
가 뒷받침하고 있다.

이렇게 진보적사상을 지녔으면서도 그는 별다른 풍파를 겪지 않고 서울에서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과거에는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간적은 없다.

아들이 고종의 시종이 되어 중추부첨지사란 벼슬을 받았어도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교우관계도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와 이규경 등 평민과 어울렸을
뿐이다.

그의 저술은 1천권에 이른다지만 현재 알려진 것은 100여권에 불과하다.

그것도 대부분 서양과학을 소개한 책이다.

대표적 저서로는 베이징에서도 발간된 "기측체의"와 "인정" 등을 들수 있다.

특히 "인정"에는 인간의 갖가지 성품의 요소들을 면밀하게 분석해 1천24개
항목으로 만든 "사과별표"라는 인물평가도표가 들어있다.

연봉제로의 전환에 쫓기는 요즘 인물고과기준이나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
에도 참고가 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는 4월은 "최한기의 달"이다.

북한에서는 50년대부터 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정도다.

한국사상사에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라는 평가를 받는 최한기의
연구가 좀 더 활발해지고 심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3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