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회에서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를 평가할 때 난세인가 치세인가를
가늠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치세는 태평성대나 소대라고도 한다.

영조때 위항시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시집의 명칭을 "소대풍요"라 지었고
그후 60년마다 그 속편이 발간돼 3집까지 나온 것은 좋은 예다.

조선시대 차지식인 그룹인 중인계층이 중심이 된 이들이 자신의 시대를
치세로 인식했다는 것은 조선시대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난세가 치세의 반대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가 치세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므로 이 시대의 문제점을 풀어나가려면 난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난세란 한마디로 혼란한 시대를 말한다.

혼란은 가치관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가치관이 없는 세상에서 본능에 의존하는 동물의 논리가 판을 치게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야말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 투쟁의 논리이외에는 그
어떤 논리도 설득력을 얻지못하는 시대가 바로 난세인 것이다.

힘의 논리만이 통하는 시대다.

정치의 장에는 독재나 전제정치가 횡행하고 세에 따라 또는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지고 오로지 영역확대를 위한
힘겨루기가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익의 조정과 분배만이 확실한 잣대이고
그 이외에는 어떤 기준도 통용되지 않는다.

사회통합의 장치를 이익배분에 둔 이상 이익을 공평하게 배분해야 하는데
실제로 공정한 이익배분이란 쉬운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이 지켜지지않을 때 정치판은 파탄에 직면한다.

또한 이익이 절대기준이 돼 이익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본말이
전도되는 가치도착현상이 사회곳곳에 파급되게 된다.

백화점의 포장코너에는 알맹이 상품보다 더 비싼 포장재와 포장기술이
상품으로 팔린다.

가수는 가창력보다 현란한 율동과 요란한 옷차림으로 한몫 본다.

TV프로에서 방영하는 요리프로에서는 요리 만드는 법을 집중적으로 실연
하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요리하면서 하는 노래나 우스갯소리, 1류호텔
주방장의 심사과정이 주요 내용이다.

젊은이들의 대화에서는 부사나 형용사는 크게 발음하고 정작 중요한
핵심어는 작게 말하는 어법이 유행한다.

지하철의 안내방송에서 조차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서 모든 승객들에게 꼭
알려야할 역이름은 작게 발음하고 부차적인 설명어를 크게 발음하는 경우가
확인된다.

결국 난세란 본말이 전도돼 가치관의 혼란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지향점을 잃은 시대라 규정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말을 빌리자면 신발과 모자가 바뀌어 거꾸로 돼있는
상태인 것이다.

남을 쉽게 믿을 수 없으려니와 믿어서는 안되는 불신의 시대다.

정도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소수가 돼 바보취급당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득세함으로써 인간악화가 인간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셤의
법칙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다.

세계적으로 민족이기주의 내지 종족우월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자행되고 있는
제국주의 논리가 세계화라는 교묘한 외피를 입고 세계제국을 도모하고 있는
이 시대는 약소국의 입장에서 보면 난세중에서도 가장 힘든 난세다.

세계가 하나의 제국이 돼 새로운 위계질서로 재편될때 약소민족읜 운명은
불을 보듯 자명한 것이다.

난세는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다.

따라서 난세를 종결시킬 의무 역시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져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난세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위와같은 난세의 징후들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에
앞서 평화공존하는 시대사상을 창출하여 올바른 가치기준을 세우는 일이
급선무다.

그리하여 개개인은 인격수양과 의식개혁을 통해 시대정신이 제시하는 기준과
원칙을 지켜나가고 국제기구와 개개의 국가사회는 난세의 구조를 깨고 새로운
시대사상에 입각한 제도개혁을 추진해야하는데 무엇보다도 강대국의 각성이
요청된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