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백세를 맞은 원로법학자 최태영 박사.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시절 여러차례에 걸쳐 입각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오로지 학자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때문에 일반인들에겐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0년 황해도 은율 태생인 그는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수와
서울대 법대초대학장을 역임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했고 학술원 최고령 회원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가 그의 초등학교 은사.

얼마전 85세의 나이로 타계한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 여사는
서울대 법대 제자다.

특히 백범은 그와 아주 가까운 사이로 중매를 서주기까지 했다.

부인은 백범 부인의 제자였다.

백범이 해방후 귀국했을때 거처를 경교장으로 정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최 박사다.

많은 사람들이 덕수궁으로 모시려 했으나 백성과 가까이 지내려면 경교장이
낫다며 설득했단다.

이시영 이동녕 안창호 이상재 이승훈 오세창 신익희 정인보 안재홍 선생
등 당대의 큰 인물들과 연을 맺었고 양주동 이희승씨등 학자들과도 교분을
가졌다.

연세대 설립자인 언더우드 박사 신사참배를 반대했다가 감옥살이를 한
밀러 목사 등 외국인선교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일제치하에서는 민족정기를 내세우며 지조를 지켰다.

이 과정에서 여러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최 박사는 법학자이지만 법학분야 못지않게 한국역사에도 심취했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민족혼의 분출구를 역사에서 찾은 것.

이런 노력의 결정으로 지난 88년에는 미수를 넘긴 나이에 한국상고사 입문
을 영문판으로 출간했다.

두계 이병도 박사와 함께 쓴 이 책은 단군조선의 실재등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있던 한국상고사의 중요부분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미국 알래스카대학 한국학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집필한 이 책은 그곳
대학원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외국 학자나 지식인중 상당수가 일제의 식민사관 틀안에서 한국사를 인식
하고 있는 것을 고쳐보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다는 평.

특히 그는 일본 황실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여러 서적의 문구를 통해
입증했다.

이런 내용이 담긴 서적을 찾기위해 자신의 재산을 바쳐 노력해온 인물
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그의 일생은 민족의 뿌리찾기와 극일을 통한 민족정신의 재정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수 있다.

그는 일곱살때 국채보상운동에서 웅변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일본한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를 갚지 못하면 일본에 매여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나라에 돈이 없어서 못갚는다니 우리라도 모아서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의 초등학교 은사이자 기독교운동의 거목이었던 백남훈 선생은 자서전
"나의 일생"에서 이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국채를 갚기위한 전국민모금운동에서 나이 어린 최군이 연설자로 나서
가는 곳마다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술회한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어릴적에 싹튼 민족정신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