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 경제평론가. 소설가 >


경제 개혁에 실패한 러시아가 위기의 늪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은 정치적 불안정을 부른다.

그래서 러시아가 와해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러시아 실패에 대한 진단은 간단명료하다.

러시아의 경제 개혁은 명령경제체제를 뜯어내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려는
노력부족 때문에 실패했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개혁의 노력이 부족했던 이유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체로
성공했는데 왜 러시아는 그렇게 소극적 태도를 보이다가 실패했는가.

먼저 꼽아야 할 것은 러시아의 과제가 어느 나라보다 컸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명령경제체제를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도입했던 나라다

당연히 그 체제를 뜯어내는 일이 크고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큰 과제는 아주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을 요구한다.

안타깝게도, 소련의 붕괴 과정에서 갑자기 태어난 터라 러시아에선 그런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나 집단이 나오기 어려웠다.

다음엔 소련이 하도 압제적인 나라여서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공산주의 세력을 대체할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개혁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됐고 자연히 그 개혁은 근본적이지
도, 열성적이지도 않았다.

애초에 소련이 개혁을 시도한 것은 공산주의 체제를 뜯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1985년에 경제 개혁(perestroika)과 사회 개방(glasnost)을 정책으로 내건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도전받지 않는 공산당의 지도 아래 생기를 되찾은
사회주의 이념을 따라서" 개혁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 그 폐허에서 솟은 나라들마다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했다.

급진적 개혁을 시도한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까지도 공산주의 체제에서
출세했던 공산당원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므로 개혁은 권력을 그대로 움켜쥔 세력의 기득권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국유재산의 민영화와 매각에서 그런 한계가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재산의 공정한 배분이라는 목표는 사라지고 집권세력에 의한 과점이 나타
났다.

그래서 개혁의 도덕적 권위는 상실되고, 경제는 비효율적이 되고, 빈부격차
가 심해졌고, 개혁에 적대적인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 하나 개혁의 성과를 작게 만든 것은 러시아에선 개인의 자발적 활동이
완전히 잊혀졌다는 사정이다.

개혁의 바람이 불었을 때, 중국이나 동유럽에선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활동
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지닌 세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 세대 앞서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선 러시아엔 그런 세대가 없었다.

시장경제체제가 들어선 뒤에도 시민들은 그것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했고
오히려 명령경제체제를 선호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장점들이 다른 나라의 경우보다 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러시아경제는 어떻게 될까.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 마지못해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인정하게 된
사람들은 러시아의 실패가 시장경제에 내재하는 무슨 결점을 드러낸 것처럼
여기면서 은근히 반기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가 다시 명령경제체제로 돌아갈 가능성까지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명령경제체제를 세우는 일은 무척 힘들다.

소련이 명령경제체제를 세우는 과정에서 수천만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일깨워준다.

시장경제를 보다 이상적으로 만드는 것이든, 명령경제체제를 시장경제체제로
바꾸는 것이든 경제개혁은 근본적일수록, 그리고 과감할수록 성과가 크다.

개혁조치가 근본적이고 과감하면 개혁이 시행되는 동안 시민들이 받는
고통은 크지만 개혁의 성과는 빨리, 그리고 크게 나온다.

그래서 개혁으로 인한 고통의 총량은 최소화된다.

이것은 이미 많은 나라들의 경험으로 입증된 명제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이번 러시아의 경험도 실은 그것에 대한 예외가 아니라
그것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예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