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체는 하나의 문화상품입니다.

디자이너의 손을 떠나면 독자적 사회성을 갖고 생명력을 키워 가지요"

임진욱(33.윤디자인연구소 디자인개발실장)씨는 서체디자이너다.

인쇄나 전자매체에 필요한 한글 글꼴을 만드는 사람이다.

서체란 활자를 조판하는데 필요한 크기와 굵기를 가진 글자 한 벌.

한글에서 명조체 고딕체 샘물체 필기체 등의 이름을 가진 것이 그것이다.

80년대말 이후 본격적인 개발이 이뤄져 현재 1천여종이 개발돼 있다.

"흑백영화" "소망" "소나기" "센스"체 등 이름부터가 새롭게 느껴지는
서체들이 나와 있다.

임씨는 서체개발 업계에서 실력자로, 또 사명감을 지닌 디자이너로 이름나
있다.

일각에선 예술성과 공익성을 외치는 그를 "글꼴 운동가"로 부르기도 한다.

"한글을 세계적으로 내놓을만한 문화유산이라고 자랑만 하지 막상 그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노력은 부족한 것 같다"는 게 그의 불만이다.

그가 최고로 생각하는 서체는 바로 한글 원조인 훈민정음 목판본이다.

조형면에서는 물론 기능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수준이라고 말한다.

훈민정음 목판본이 바로 그의 "경쟁상대"인 셈이다.

그가 문자, 그것도 한글에서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은 서울대
미대 산업디자인과 4학년 때인 지난 91년.

당시만해도 동기생들은 문자보다는 그래픽과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이
많았다.

서체디자인은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로 "천대하는" 풍조였다.

그 자신도 그랬다.

지금은 산업디자인학과 재학생중 30~40%가 문자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변했다.

아름다움에 기능을 갖추면 더 효용성이 높다는 새로운 미학이 자리잡은
셈이다.

"서체는 수많은 글자로 인쇄되는 과정에서 동일한 개념과 컬러를 가져야
합니다.

서체디자인은 변화하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이지요.

내가 평생 걸어야 할 길이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느꼈지요"

한글에서 새로운 예술세계를 느낀 것이었다.

이후 그의 미술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중고교 시절부터 키워 왔던 서양화가의 꿈은 자연스레 잊혀졌다.

4학년 2학기내내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글꼴을 만드는 일에 메달렸다.

습작으로 만들었던 글자체들은 지금 그의 컴퓨터에 보관돼 있다.

내년쯤에는 상용화할 계획이다.

예술관이 바뀌자 현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92년 졸업과 동시에 윤디자인연구소에 들어갔다.

지금은 디자인실장으로 1백40여종의 서체를 개발한 윤디자인연구소 25명의
식구를 이끌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2년에 3개정도의 새로운 서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서체 하나 하나엔 사람의 표정 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이 들어 있다.

컴퓨터 보급이 확산되면서 개인마다 개성있는 서체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시대도 곧 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서체디자이너들이 해야할 일이 많단다.

"한글 서체디자인은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합니다.

1천여종이 개발됐다지만 우리가 목말라 하던 글꼴 중에서 기본적인 것만
겨우 만들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이제 정말 한글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서체를 만들 때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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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설 기자 yskwo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