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재건촉진회 ]]

경제재건촉진회는 그 취지문에서 스스로 "기간산업건설 실천기구"라고
주장했다.

1개월의 단명에 불과했지만 경제재건촉진회의 설립배경과 활동을 살피는
것이 60년대 경제변천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자주 얘기했지만 60년 4.19직후부터 싹트기 시작해 61년
1월에 창립됐던 한국경제협의회가 경제단체로서 이상형에 가까웠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경제협의회의 창립 정신과 구상에 비교해 볼 때 경제재건촉진회는
"기형적 조직"으로 볼 수 있다.

우선 경제재건촉진회는 선각 경제인들이 경제협의회를 설립하면서 근본
과제로 삼은 "정치 예속으로부터의 자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5.16 군사정부에 예속되는 단체였다.

둘째 회원수도 문제였다.

민간경제계를 총망라해 대동단결했던 협의회는 회원이 당시 대표적 기업인
70여명이었다.

재건촉진회는 그 5분의 1도 안되는 13명으로 축소됐다.

뿐만 아니다.

경제계 주류라할 김연수(삼양사) 김용완(경방) 전택보(천우사) 등이 참여
하지 않았다.

또 경제협의회가 장면 정부의 "경제제일주의"의 성공 조건으로 강조했던
"윤리제일주의"는 재건촉진회에선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다만 재건촉진회가 경제협의회의 구상을 승계한 것은 태백산종합개발구상
으로 대표되는 기간산업건설안과 그 재원마련을 위한 외자도입이었다.

특히 윤리제일주의의 포기는 꼭 짚고 넘어가야할 중대 문제이다.

5.16 군사정부는 경제는 중시했으되 윤리제일주의는 포기했다.

이는 오늘날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의 근원을 경제발전을 떠받치는 윤리의
붕괴에서 찾아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5.16 군사정부가 과거청산조치로 경제협의회를 해산시킨 것은
큰 잘못이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군사정부는 경제협의회를 존속시켰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미 선각 경제인들의 경륜에 도움을 받았어야 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5.16후 3~4년 큰 실책의 연속과 경제의 표류 상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가지 분명히 할 게 있다.

전경련과 소위 부정축재자와의 관련성이다.

일부 대학교수들나 언론은 전경련도 "부정축재자"가 조직한 경제재건촉진회
를 승계했으므로 부정축재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별도로 논할 기회를 갖겠다.

다만 재건촉진회원 13명의 태반은 자유당 정권이 준조세처럼 할당한 정치
자금을 냈기에 부정축재법에 저촉됐었다는 점만은 우선 밝혀두고 싶다.

오늘의 전경련은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취지와 정신을 이어받은 조직이다.

게다가 부정축재자 문제는 이미 장면 정권하에서 부정축재처리법안 심의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돼 처리됐다.

4.19 직후 격앙됐던 국민들도 일응 수긍했었다.

부정축재자 문제는 이렇게 봐야 한다.

5.16 군사정부가 국민의 불만을 배출하는 도구로 이를 이용했다는 것이
옳은 시각을 것이다.

군사정부는 이와 함께 기업인들을 한번 단죄함으로써 경제건설의 수족으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내가 62년 10월 전경련 사무국장을 맡은 이후 이 단체를 한국경제협의회의
창립 정신에 가까운 조직으로 발전시키는데 3년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음을
지적해둔다.

다시 경제재건촉진회 얘기로 돌아가자.

촉진회는 일사천리로 구성은 됐지만 회장선출에서 곧바로 암초에 부딪혔다.

난세에 회장을 하려는 사람이 나올리가 없었다.

우선 제일 연장인 설경동(대한산업)을 지목했으나 그는 "나이 먹은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며 사양했다.

할 수 없이 13명 회원이 투표에 들어갔다.

결과는 최태섭(한국유리) 6표 이정림(대한양회) 4표 이병철(삼성) 3표 등
으로 분산됐다.

(당시 투표용지는 지금도 여의도 전경련 사무국에 보관돼있다).

그러나 최다득표를 한 최태섭은 "나는 재력도 능력도 없고 연배로 볼 때도
회장자격이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재투표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이정림 7표, 이병철 5표로 나왔다.

회장으로 뽑힌 이정림은 "이병철 사장이 맡아야 한다"고 또 사양했다.

저녁 때까지 옥신각신 하다 결국 이병철에게 생각할 시간도 줄 겸 이정림이
한달 가량 우선 회장을 맡고 다음에 이병철에게 넘기자는 홍재선(금성방적)의
절충안이 채택됐다.

재건촉진회로서 무엇보다 다급한 것은 석방될 때 혁명위원회와 약속한 기간
산업 공장건설계획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고회의가 당시 선포한 "부정축재특별처리법"에는 벌과금을 그해
12월31일까지 현금으로 완납치 않으면 다시 인신 구속하도록 돼있었다.

수개월내에 수십억원의 벌과금을 마련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재건촉진회는 현금 대신 공장을 건설해 대납하는 방안을 최고회의에
건의했다.

이 건의는 그해 8월에 받아들여져 "특별처리법" 제18조2창은 "부정축재벌과
금을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공장을 건설하여 대납할 수 있다"는 물납제 내용으
로 개정된다.

이렇게 되자 촉진회 회원들은 상당한 시간여유를 갖고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자연히 재건촉진회의 다음 과제는 "기간산업건설 민간계획안" 작성과
공장건설자금조달로 집약됐다.

공장건설의 경우 국내 저축에 의한 내자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어 협의회
때부터 구상해온 외자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했다.

이에 따라 촉진회는 13명 회원 전원이 임원(회장 부회장 각 1명, 이사 11명)
을 맡고 두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했다.

기간산업건설위원회와 국제경제협력위원회였다.

기간산업건설위원회는 회원절반인 6명으로 공장건설 입지조사 설계.사업계획
작성 시설연구 등 건설실무를 담당키로 했다.

국제경제협력위원회는 외자 및 기술도입, 기술 검토, 세계적 기업운영기업
연구, 수출시장 조사 개척, 외국실업인 초청, 외자유치 교섭단 파견 등을
추진키로 했다.

"기간산업 실천기구"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나타낸 셈이다.

<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