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선생은 백성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걱정한 실천궁행의 선비였다.

역학자만이 아니라 실학사상의 선구적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실학사상과 관련된 사상적 일면이라는 것은 그가 시도한 현대적 의미에서의
상업의 장려와 물산의 흐름에 기반한 상업적 이익의 재분배과정에서 알 수
있다.

역학실력으로 천하를 주유했던 선생이 실학적 사유체계와 관계를 맺은
이유는 역학 자체가 가진 순기능, 즉 현실적으로 불운을 극복할수 있는
방법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 두개 정도를 살펴보자.

선생은 처가와 관련된 역모사건의 피해자로 한동안 벼슬과 인연이 없이
지내다가 선조의 등극후 다시금 입지를 얻게 된다.

벼슬길로 나가게 된 것은 선조 6년(1573년)에 인재천거와 관련된 어명에
의해서이다.

탁행(본받을 만한 뛰어난 행동)으로 인한 특채형식의 발탁이었던 셈이다.

종6품에 해당하는 포천현감에 제수되었다.

발령받은후 임진강 범람을 미리 예견하여 제방공사를 벌여 많은 인명을
구한다.

그리고 고을 재정이 극도로 빈약한 것을 염려하여 임금께 상소를 올린다.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주와 황해도 풍천부 초도정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재정을 충당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앞일을 내다보고 한 것이었다.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는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 이 건의를
묵살해버린다.

토정 역시 미련없이 벼슬길에서 물러나버린다.

3년후, 다시 아산 현감에 제수되었다.

부임 첫날 아침밥상에 맛있는 물고기가 올라온다.

부임하는 관리마다 찾는 이 고을의 특산이며 임금께 올려지는 진상품목
이었던 것이다.

이 물고기를 위해 저수지가 특별히 관리되고 있었다.

농사는 뒷전이었다.

당장 진상품목에서 빼버리라고 명령한다.

현감으로 부임후 초도 순시한 결과 유난히 걸식하는 거지들이 많았다.

현청 앞에 걸인청을 꾸며 이들 거지들로 하여금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짜고
새끼를 꼬게 하였으며 호미, 낫, 칼 등을 만드는 대장장이 일도 배우게
하였다.

만들어진 생산물은 다음 장날에 팔아 쌀과 베로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놀고 먹는 이에게는 밥도 주지 말라는 엄격한 규율 덕에 걸인청의 질서는
자리를 잡아갔다.

늘어가는 걸인청의 수입은 춘궁기에 힘든 사람들에게 싼이자로 대부하여
주었다.

현실극복의 적극적인 개운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지금도 아산에 가면 당시 현청 앞의 걸인청 건물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성철재 <충남대 언어학과교수/역학연구가 cjseong@hanbat.chungnam.ac.kr>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2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