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가지 예화를 통해 그의 따스했던 인품의 한 측면을 조망해보자.
어느 해 선생과 형제들이 모여 조부의 묘자리를 구하러갔다.
지관의 말은 당대에 당상관이 2명 정도 나올 명당이긴 하나 막내인
토정선생의 자손에겐 불길한 터라는 것이다.
선생은 근심하는 형님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희생양이 되기로 작정한다.
불길한 일은 제가 다 떠맡겠습니다.
이 자리로 결정하지요.
묘자리의 효과가 있었는지 과연 당대에 2명의 정승이 출현했다.
두 조카 산해와 산보는 각각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제수받아 1품 정승의
반열에 당당히 올랐다.
반면 선생의 네 아들은 불행하게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후일, 영의정이었던 이산해가 자신의 글선생이기도 했던 토정선생의 사후에
이렇게 회상했다.
"재주는 충분히 한 시대의 질서를 바로잡을만 했으나 세상이 쓰지를 않았고,
지혜는 어둠을 낱낱이 밝힐만 했으나 세상사람이 알아주질 않았다".
선생의 딸이었던 산옥이 어떤 연유로 문둥병으로 불리는 불치의 나병에
걸리게 되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딸과 함께 나환자촌으로 들어간다.
기를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었던 도사였기 때문에 딸의 병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번의 약재와 독극물을 통한 실험 끝에 생지네즙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산옥은 부친의 지시대로 일광욕과 생지네즙을 복용하며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선생은 천형에 걸린 딸의 장래를 염려하여 장차 점치는 신복으로 만들 것을
결심했다.
각종 역학 비법과 단법 수련을 통해 실력을 길러 주었고 불멸의 저서인
월영도를 전수했다.
월영도는 탄생과 관련된 시간적 자료만으로 부모와 처의 성씨, 형제의 수,
고향, 수명 등을 알 수 있는 토정의 비전이다.
현재 전국에서 몇 안되는 사람만이 그 심오한 뜻을 깨달아 활용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성철재 <충남대 언어학과교수/역학연구가 cjseong@hanbat.chungnam.ac.kr>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9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