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되게 휘둘렀기 때문이리라.

주눅들어 있는 사람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지나가고 있는 고개 숙인 사람들 속에 고개숙인
사람들이 있다.

이제 그 극성스럽던 게릴라 장대비도 개고 햇빛이다.

푸른 하늘이다.

아직 여기저기 아픈 상처들이 널려 있지만 옥상 빨랫줄에 받돋음하고
빨래를 너는, 푸른 하늘을 거기 팽팽하게 끌어내리는 젊은 아낙들이 보이기도
하고 물빠진 들녘에선 고추들이 빠알갛게 약이 오르고 있는 모습을 만날
수도 있다.

"약이 오르다"

그렇다.

이게 바로 중요하다.

우리 고려가요에 이런 노래가 있다.

"남산에 자리보아/옥산을 벼어 누어/금수산 니블안해/사향 각시를 아나누어
/약든 가삼을 맞초압사이다 맞초압사이다"

"만전춘"의 한 부분이다.

조선조의 지체 높으신 선비님네들로부터는 상스러운 남여상열지사로
외면되었던 것이지만 문학적 향기가 드높은 노래다.

특히 "약든 가삼"이란 표현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흔히 국어학자들에 의해서는 "약"이 한자어 "약"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향주머니를 찬가슴"으로 통석되고 있으나 이 말은 그러한 산문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 이상의 아주 암시적이며 상징적인 표현의 것이다.

"약이 오른다"는 것은 "약이 오른 고추" 등에서 보이듯 완전한 춤만의 상태,
그 절정을 뜻한다.

제맛이 나는 그런 완성의 경지가 거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약든 가삼"이란 사랑의 절정, 또는 그 충만의 상태를 그대로
집약해 보이고 있다.

더군다나 그런 가슴을 그대로 맞추고자 간절하게 청유형으로 노래하고
있는 데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신품의 경지를 만나게 된다.

어디 그 뿐인가.

이 노래속의 사랑의 공간을 어둡고 좁은 퀴퀴한 방구석이 아니다.

남산에 옥산을 벼개로 삼고 금수산을 이불로 삼아 사향 내음이 나는
각시를 품고 누워 있다.

좀스럽고 왜소한 사랑놀음이 아니다.

확트이어 있다.

이제 가을이다.

화악 트이자.

들판의 고추들처럼 빠알갛게 약이 오르자.

약 오른 고추가 되자.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