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최후의 피난처"

미국 언론들은 요즘 미국경제를 이렇게 일컫는다.

도쿄발 경제공황이 세계 전역을 강타하면서 소비시장으로서 미국의
중요성이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위기와 내수침체를 피해 아시아 각국의 자본과 상품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요즘의 상황을 잘 묘사한 표현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미국 최대의 무역항인 캘리포니아 롱비치에는 아시아로부터의
"피난 상품"들이 빼곡이 쌓여 있다.

올들어 7월말까지 이 항구에 부려진 화물의 명세표를 보자.

한국발 상품이 작년 동기보다 34% 증가, 홍콩은 29%, 중국 21%...

그 바람에 미국의 고질적인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올 5월말까지 수출은 2% 늘어난 반면 수입은 6%나 증가하면서 불과 5개월
사이에 무역적자가 1천6백억달러를 넘어섰다.

이중 4백억~5백억달러는 아시아 위기의 부산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쯤 되면 미국전역에 "무역적자 비상"이 걸리고 의회는 보호주의 입법으로
법석을 떨 만도 한데 그런 움직임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수입 범람"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아시아산
저가 상품 유입에 따른 인플레진정 효과를 분석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경제문제에 접근하는 미국 제1의 키워드는 공급(수출)이 아닌 소비(수입)
임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소비에 관한 미국인들의 전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국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소비에 대한 교육부터 받는다.

한 컨설팅 기관이 11개국의 7~12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소비성향을
조사한 결과 미국 어린이들의 씀씀이가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용돈에 대한 저축률을 보더라도 일본 어린이들이 62%로 단연 선두였고
중국이 60%로 그 뒤를 이었다.

독일이 46%,프랑스와 영국의 어린이들이 각각 30%와 26%를 기록한 반면
미국 어린이들의 저축률은 단 20%에 그쳤다.

미국인들은 씀씀이에 관한 한 노소는 물론 빈부간에도 별 차이가 없다.

미국 금융계는 돈이 없이도 돈을 쓸 수 있도록 크레딧 카드라는 요술
방망이까지 "발명"했다.

은행이나 크레딧 카드 회사로부터 끌어다 쓴 빚이 많을수록 높은
"신용도"가 주어지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인들의 이런 소비 습벽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조롱
거리였다.

세계최대의 무역적자를 안고 있는 주제에 흥청망청 소비에만 정신을
팔고 있는 한 미국의 몰락은 시간 문제라는 경고와 예언이 유행을 이뤘다.

반면 열심히 생산에 매달리고 그렇게해서 번 돈을 부지런히 저축한
아시아의 "생산자 가치(Producer Values)"가 모범답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1백80도 달라졌다.

미국의 "소비자 가치(Consumer Values)"가 쓰러질 듯 했던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를 살리는 "공생의 미덕"임이 입증돼 가고 있다.

80년대와 90대 초 파멸 일보직전까지 몰렸던 멕시코와 브라질 등 중남미
경제를 구원해 준 손길도 미국의 소비자들이었다.

반대로 "벌고 모으기"에만 혈안이었던 일본은 오늘날 그 자신은 물론
인근 아시아 국가들까지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 "재앙"이 돼버렸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미국의 소비자금 중 상당부분이 아시아에서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최대의 저축상품인 미국 재무부채권(TB)의 최고고객은 바로
일본이다.

"세계경제 피난처"에서 쓰이는 돈을 다름아닌 "피난자"가 대주는 희한한
장면이다.

"벌기(모으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는 선현들의 얘기가 얼마나 기막힌
금언이었는지를 새삼 곱씹게 된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8월 18일자 ).